4월 재보선이 끝나자 한나라당 발등에 불이 붙었다. 강원도의 패배는 '전화방 사건'으로 불리는 자살골 때문이라 치자. 그러나 천당 아래 동네라는 분당에서의 패배는 수도권의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사실 선거 전부터 위험신호는 계속 울렸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설마 이변이야 일어나겠느냐면서 태연자약했다. 분당 같은 텃밭에서 한나라당 공천은 당선과 마찬가지였다. 당 지도부는 미래 권력을 경쟁할 위험성이 있는 정운찬 전 총리의 영입을 꺼렸다.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한 '구정객'들의 이전투구도 계속됐다. 망설이던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그 빈틈을 보았고 정확하게 승부구를 던졌다. 막상 투표일이 닥치자 한나라당은 투표율이 높아질까 노심초사했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 전환(轉換)인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다들 희망을 가졌지만 그 비도 분노한 '넥타이 부대'를 막지 못했다. 그들이 빗길을 무릅쓰고 일 년짜리 국회의원 투표에 나서게 한 '울화'의 강도를 한나라당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선거가 끝나자 한나라당은 영락없이 난파선 짝이다. 마치 노무현 정권 막바지 열린우리당을 보는 것 같다. 아직까지 그때처럼 침몰하는 배에서 앞다투어 뛰어내리지 않는 건 정권이 일 년 반이나 남아 있는데다 한나라당 내에서 다른 살림을 차려온 친박계라는 존재 때문이다. 결국 친박계의 지원에다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친이계'의 분열로 황우여 의원이 새 원내대표가 됐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지도부는 이 와중에도 비대위원장으로 정의화 의원을 지명하는 꾀를 냈다. 그는 6'15선언의 열렬한 지지자다. 스스로를 소위 '소장파'라고 부르는 의원들도 따로 모였다. 그 중엔 권력의 문고리를 잡을 적기(適期)라고 여기는 이도 있고 내년 총선 걱정에 도생(圖生)의 길을 찾아나선 이도 있다. 그들 새 지도부와 소장파 할 것 없이 모두가 지금 당이 위기라고 한다. 이러다가는 전부 다 공멸할 거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들이 바로 당을 좌초하게 한 장본(張本)인 것이다. 그들이 흔든 당 정체성은 보수층의 이반을 불렀고 그들이 동조한 경제 정책은 중산층과 서민의 분노를 불렀다. 사실 한나라당이 망할 길로 접어든 건 오래됐다. 정권 초기 '고소영'으로 회자된 인사 때 금이 갔고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했을 때 이미 무너졌다. 전공이라던 경제는 외형만 신경 썼지 민생을 몰랐다. 경제를 살린다고 정권을 잡고선 고환율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여 재벌들 배만 불린 꼴이 됐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를 잡겠다고 이자율을 올리니 가계대출을 한 서민들만 죽을 맛이다. 돈을 번 재벌들은 상생이니 일자리 창출이니 하는 데엔 흉내 내지 오불관언이다. 대통령이 공정을 외치고 눈을 흘겨도 재벌들은 정권이 유한하다는 걸 믿고 있다. 민심 이반의 결정타가 된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드러난 부패 사슬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새 원내대표는 민심을 돌려보겠다고 대통령 후보자 공약 같은 정책을 내놨다. 10대 등록금, 20대 일자리, 30대 보육 문제, 40대 내 집 마련, 50대 노후 보장 등 '생애 맞춤형 복지 정책'이 그것이다. 이런 난제들이 원내대표 한 사람의 결심으로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라면 정치란 얼마나 쉬운 것인가? 돈 나올 곳은 없는데 정치판이 온통 복지 타령인 건 전부 표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지금까지 그저 친서민을 외치다가, 무상급식으로 지방선거에서 재미를 본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란 걸 치고 나오자 은근슬쩍 복지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있다. 당장 다섯 살짜리를 나라가 책임지겠다면서 의무교육에 포함시켰다. 소장파든 노장파든 기회주의 웰빙 습속의 여당 의원들이 표를 위해 좌클릭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해소 같은 근원적 문제는 뒷전이다. 그러니 다음 세대를 걱정해서 무분별한 복지는 안 된다고 말해본들 들릴 리가 없다. 한나라당의 위기가 보수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얘기한들 소귀에 경 읽기다.
그들이 보수의 원칙을 살렸다면 대기업이 배부를 때 중산층과 서민도 함께 배가 불렀을 것이다. 작고 강한 정부를 구현했다면 강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토목공사 한다는 욕을 듣지는 않았다. 세종시에 정부를 쪼갠다는 발상은 진작에 철회했을 것이다. 이래서 정치인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철학이요, 역사인식이다. 철학이 없고 이념이 없는 정치인은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는 포퓰리즘에 빠져들고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한나라당의 패망이 아니라 이 나라가 그런 정상배들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다.
전원책(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