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선생님 됐어요"…신명고 5대 스승과 제자

입력 2011-05-14 08:13:42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교권이 무너진다고 해도 진정한 스승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이 시대의 선생님들은 많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은사가 몸소 보여준 참교육의 미덕을 이제 제자가 좇아가고 있다. 이채근기자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교권이 무너진다고 해도 진정한 스승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이 시대의 선생님들은 많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은사가 몸소 보여준 참교육의 미덕을 이제 제자가 좇아가고 있다. 이채근기자

한때 이 땅에서 스승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미덕이요, 으뜸의 가치로 여겨진 때가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교사는 존경받는 존재였다. 하지마 언젠가부터 '스승', '교사'의 위신은 그 한계를 모르고 추락하기만 했다. 입시교육과 경쟁에 쏠린 학교현장 속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논하는 것은 마치 구시대적 발상처럼 여겨질 정도다. 학부모가 학교 현장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기 부지기수고, 학생들은 걸핏하면 휴대전화 동영상을 들이댄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래도 '스승'은 여전히 삶의 길을 알려주는 '등불'이고, 부모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품어주는 '포근한 가슴'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교권이 무너진다고 해도 진정한 스승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이 시대의 선생님들은 많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은사가 몸소 보여준 참교육의 미덕을 이제 제자가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제자가 오늘의 직장동료?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신명고에는 졸업생이 교사가 되어 모교에 부임한 경우가 꽤 많다. 현재 신명고에는 5대를 잇는 스승이면서 제자인 교사들이 있다. 가장 맡언니 노릇을 하는 사람은 이종완(61) 선생님이다. 1974년 부임해 내년 2월이면 정년을 앞두고 있다. 교련과 보건교사로 38년째 교편을 잡고 있다.

그 뒤를 잇는 권인숙(53) 선생님은 이 학교를 1976년 졸업한 뒤 1980년부터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권 교사가 "제가 고 3때 이 선생님이 처음 부임해 오셨다"고 하자 스승이 기억을 바로잡아주었다. "너를 가르친 건 네가 고 3때지만, 처음 신명고에 부임해 온 것은 네가 2학년 때"라고 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수천 명의 제자를 가르쳤음에도 기억은 정확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학생이 없기 때문이리라.

권 교사의 제자는 윤명희(48) 선생님이다. 윤 교사는 83년 졸업생으로 89년 교사가 됐다. 권 교사는 윤 교사에 대해"첫 부임했을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서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던 '수제자'"라고 소개했다.

박진향(32) 교사는 2학년 때 윤 선생님에게서 독일어를 배웠다. 윤 교사 역시 제자의 학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워낙에 성격 좋고, 활달한 학생이어서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죠. 언어 과목이다보니 학생들에게 발표를 많이 시키면서 자연스레 이름을 외우게 되요."라고 했다. 김영주(28) 교사 역시 윤 선생님의 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2001년 졸업생으로 2009년부터 모교의 교단에 서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일시적으로 막내 교사 한 명이 더 생겼다. 교생실습을 나온 음악과 최주진(22) 씨 역시 이 학교 출신인 것. 주진 씨는 박 교사에게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저도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마치 연어가 회귀하듯 졸업생들이 모교로 찾아드는 것은 학생시절 배웠던 선생님의 따뜻한 가르침 때문이다. 박 교사는 "아마 신명고가 아니면 교사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3학년 진학 후 어느 날 선생님께서 사범대 진학을 권유하길래 '하다하다 할거 없으면 교사할게요'라고 되받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는데, 학생들을 정말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이곳에서라면 교사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자리를 잡았다는 것. 그래서 박 교사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4년의 계약직 교사 생활 끝에 신명고의 정식 교사가 됐다. 그는 "계약직으로 있는 동안 다른 학교에서 일할 기회도 많았지만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냥 버텼다"고 했다.

김영주 교사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뒤 고향으로 내려와 모교의 수학 선생님이 됐다. 김 교사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모든 과정에 은사님들이 계셨다"며 "처음 진로를 결정할 때도 그랬지만 취직자리를 알아볼 때까지도 은사님들이 마치 자식의 일처럼 상담해주셨다"고 했다.

교생실습을 하고 있는 최주진 씨는 대학에서 지정된 교생실습 학교를 포기하고 별도로 모교에 교생실습을 요청했다. 굳이 어려움을 무릅써가며 모교를 고집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곳은 교육·배움의 천국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신명고는 입지 여건이 좋지 않다보니 가정형편 등의 이유로 경제적'정서적으로 결핍된 학생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 바로 선생님들이었던 것. 박 교사는 "요즘 학교는 학력이 학생에 대한 모든 평가를 결정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공부 못 하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고 한 번 더 관심을 가져주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라고 했다.

◆스승에게 선생의 길을 묻다?

긴 세월동안 스승도 변하고 제자도 변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님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뭘 하나 시켜도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라며 눈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온다. 김 교사는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정말 어려운 존재였는데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아 한때는 속이 상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3년 동안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이제는 아이들이 버릇이 없다기보다는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물어온다는 것을 알게 됐고, '왜'라는 물음에 스스럼없이 대답을 해주며 서로 이해하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중년이 된 선생님에게 '스승'의 존재는 여전히 거룩하다. 권 교사는 스승인 이 교사를 보면서 "선생님은 잘 해주시고 못 해주시고를 떠나 부모님과 같이 계셔주시기만 해도 좋은 존재"라고 했다.

한때는 학생이었다가 이제는 '직장 동료'가 된 제자들을 보는 스승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걱정스럽다. 그들에게는 아직 뭘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스승'의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후배이면서 제자인 교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라"고 했다. 수십 번의 스승의 날을 거치지만 여전히 제자들이 찾아오면 도망치고 싶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교사는 "내가 정말 교사이긴 했지만 '스승'이긴 했는가를 가끔 자문해보는데 부끄러운 순간도 많다"며 "제자들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권 교사는 "지금 그 자리에서 즐기면서 교사 생활을 하되 학생들을 신뢰하라"고 조언했다. 학생들은 믿어주는 만큼 그 믿음에 부응한다는 것. 한 번은 '일진회' 소속 문제아인 줄 모르고 권 교사가 학생에게 '서기' 역할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자신에게 어떤 책임감을 부여해주는 그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웠던지 그 학생은 어긋남 없이 서기 일에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다고 했다. 32년을 교직에 몸담은 권 교사는 "한 번도 내가 맡은 아이들이 자퇴를 당한다든가 말썽이 없었던 것은 학생들과 나 사이에 믿음이 기반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선생님이 먼저 학생을 믿어주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이종완(61) 씨. 교련·보건과 교사, 1974년 부임, 2012년 2월 정년을 앞두고 있음.

권인숙(53) 씨. 독일어·일본어·영어·진로진학 담당, 1976년 졸업, 1980년 부임.

윤명희(48) 씨. 독일어·일본어·영어, 1983년 졸업, 1989년 부임.

박진향(32) 씨. 국어 교사, 1997년 졸업, 2001년 부임.

김영주(28) 씨. 수학 2001년 졸업, 2009년 부임.

최주진(22) 씨. 음악과 교생실습 중. 2008년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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