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감사편지 2

입력 2011-05-13 07:39:12

고교 때 국어선생님, 내 문학작품 독자되어 아직도 '가르침'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대구백화점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익(대구 남구 대명3동)

다음 주 글감은 '감사 편지-배우자에게'입니다

♥"우리 아들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

선생님, 김영희 선생님, 잘 계신지요? 선생님께서 영천초등학교에 계실 때 4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김연우 엄마입니다. 2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제 우리 연우가 6학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많이 커서 졸업반이랍니다. 아직은 어려서 학교생활을 잘할지 걱정되던 4학년의 담임을 맡으셨을 때 선생님의 성함부터 왠지 친근감이 가고 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연우를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마운 마음은 가득했지만 학교에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한 점 늘 죄송했습니다. 비록 학교에 찾아가지 않아도 엄마들은 아이들과 같이 6년 동안 늘 등교를 한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는 졸업반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 선생님이시기에 또 늘 감사했습니다.

학년이 바뀌는 봄 방학식 날 갑작스런 전화에 당황하셨지요? 지나고 나니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고향인 청도로 전근을 가신다는 연우의 말을 듣고 전화를 드려서는, "몇 년 더 영천초등학교에 계실 줄 알았는데 전근을 가신다니 이제 못 뵙겠네요." 나의 울먹이는 모습에 연우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요. 고향인 청도초등학교에서 더 열심히 선생님의 길을 걸으실 것을 알지만 서운한 마음이 너무 앞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시조 한 수 지어 올립니다.

부모님 애지중지 귀하신 몸 주시고

스승님 내유외강 냉철한 가르침에

오호라, 재탄생이네 완성적인 사람이

선생님의 맑고 고운 모습을 늘 기억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연우 엄마 올림.

김은경(영천시 완산동)

♥ "깡패가 갑자기 큰 절 올려 놀랬지"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자, 국어 선생님인 나의 선생님은 내가 문학 활동을 하면서부터 나의 특별한 독자가 되어 주셨다. 나의 데뷔작, 동인지 수록작, 두 권의 수필집 등 나의 작품을 빠뜨림 없이 읽으시고 그때마다 격려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

어느 날, 출근길에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쳤다. 알고 보니 이웃에 살고 계셨다. 퇴근길에 가끔씩 전화로 유혹하여(?) 대폿집으로 가곤 했다. 학구파인데다가 세상 경험이 많은 분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즐겁고 유익했다. 나는 여전히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선생님, 30여 년 교편생활 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분은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날도 선생님은 시구(詩句)가 떠오르지 않아, 단골 포장마차로 갔다. 겨울밤은 깊었다. 홍합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얼른 부어 마시고 집으로 돌아올 요량이었다. 시끌벅적한 둘레 사람들한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그때, 깡패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리병을 깨 들고, 피를 철철 흘리고… . 삽시간에 포장마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가운데 한쪽 두목은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새끼들, 전부 고개 수그려. 꼼짝하면 다 찔러 죽이고 말 끼다." 씩씩대는 녀석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선생님은 '이젠 죽었구나!' 벌벌 떨며,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숨까지 죽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씩씩대던 두목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선생님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절 받아 주이소. 저는 제자 ○○○입니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심더. 용서하이소." 넙죽 큰절을 하였다. 이어서, 부하들한테 고함쳤다. "동생들, 전부 무릎 꿇고 큰절 올려야지? 이분은 내 은사님이셔." "네, 형님." 이번엔 떼거리로 큰절을 올렸다.

포장마차 안 많은 손님들이 부러운 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교편생활 30여 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단다. 비록 밑바닥 인생을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스승을 알아본 사람. 사제지간 뜨거운 정을 느낀 순간이었단다. 살다 보면, 누구나 나쁜 길로 잠시 접어들 수도 있는 법. 그렇더라도 인륜의 마지막 보루만은 저버리지 않은 제자가 기특했단다. 그리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절대로 해치지 않을 사람이고, 의리 있고 늠름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선생님은 여전히 감동적인 어조였다.

말씀을 듣노라니, 술상 맞은편 선생님의 앉은키가 유난히 커 보였다.

윤근택(경산시 중방동)

♥ 수업은 깐깐, 진로상담은 인자

어릴 적 나는 어지간히도 내성적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아버지께서는 "커서 제 밥벌이나 제대로 할는지" 하고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소심한 성격, 그러다 보니 음악 실기는 거의가 '양' 아니면 '가', 반면 책상에 앉아서 차분히 풀어내는 수학은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람의 일생 동안 3번의 중요한 고비가 온다고들 한다. 중학교 3학년, 아마 그때가 내겐 그런 기회였는가 보다. 당시 담임이자 수학선생님은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 쪽 빠진 하관, 거기다 안경까지 쓰고 나니 보는 것만으로도 얼음 그 자체였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은 당연지사, 수학시간은 모두가 소나기는 피하자는 심산으로 헛기침조차 제대로 내뱉질 못했다. 그런 선생님도 제자의 진로에 대해선 너무나 인자했다.

미상불 고등학교 진로 문제로 상담이 시작됐다. 처음 나는 안동에 있는 인문계를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안동댐 수몰보상금으로 대구에 집을 샀다는 생각이 들자 급선회,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상고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처음 내 의견을 들은 선생님은 같잖다는 듯 한참이나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노려보다간 "웬만하면 당초에 생각한 대로 안동으로 가지" 하고 회유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선생님 꼭 그 학교엘 가고 싶습니다" 하고 너무나 완강하게 버티자 끝내 선생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오란다. 평소 어리바리 숙맥 같은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선생님 이건 제 인생 전반이 걸린 중차대한 문젭니다. 꼭 부모님을…!" 차갑기만 한 선생님의 얼굴! 한참을 물끄러미 날 바라보시던 선생님은 내 당돌함에 항복, "하여간 열심히 해라"는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내일은 너 때문에라도 대구엘 다녀와야 할까 보다. 그 학교는 내일 5시까지가 원서 마감이라서…." 하시곤 체념한 듯 빙그레 웃으신다.

이제는 30년이 훌쩍 지나 40년을 바라보는 시간, 처음 얼마간은 여전히 교편을 잡고 계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어느 순간 그 소식의 끈마저 놓친 지 수십 년, 지금은 살아 계신지도 불분명하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선생님이니 스승님은 두메산골 숙맥 같은 날 끝까지 믿어준 그분이시다. 어디에 계시더라도 항상 만수무강하시길 빌어드립니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 가정방문 오시다 차가 논두렁에…

곧 있으면 스승의 날이다. 나의 중학교 1학년 3반 시절 우리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우리 선생님은 체육을 담당하셨고 거기에다 총각 선생님이셔서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으셨다. 나도 그런 선생님을 많이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무태(지금 서변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은 많은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교통이 편리하지만 그 시절에는 마을 들어오는 길도 좋지 않고 완전 시골 동네였다.

학교 새 학기 가정방문 기간에 선생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되셨다. 그런데 그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님 자동차가 우리 집 근처에 다 와서 논두렁에 빠졌는데 차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때 집에는 부모님도 급한 일이 생겨서 안 계시고 언니들하고 나만 있어 그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막막한 가운데 선생님이 나에게 "선생님은 다친 데 없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오히려 저를 안심시켜 주셨다. 요즈음같이 보험회사 긴급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카센터에 연락을 하셔서 어렵게 견인을 하고 가셨다.

우리 집 가정방문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 너무 죄송했다. 한창 예민한 중학교 1학년 사춘기 시절, 선생님은 나에게 아빠 같은 존재, 친오빠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후배로부터 선생님께서 간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바쁜 생활로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고, 얼마 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너무 슬펐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한 번이라도 찾아가 뵙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는 선생님. 스승의 날만 되면 후회의 눈물이 가슴에 쏟아져 내린다.

우리 1학년 3반을 진심을 다해 가르쳤고 사랑으로 대해준 선생님, 우리 모두가 선생님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김은영(대구 북구 서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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