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맞춤패션] '한땀 한땀' 장인의 명맥 2人

입력 2011-05-12 14:45:32

고객이 찾는 한 우리의 바느질은 멈추지 않는다

장인(匠人).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물건을 만들기에 그 앞에는 으레 '명품'이란 수식어가 따른다. 최근 장인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특히 맞춤양복 가게들이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 1980년 후반 대구에 1천여 곳이던 맞춤양복점이 현재 50여 곳에 불과하다. 맞춤양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들을 찾아보았다.

◆ 양복재단사 최고 영예 김태식 명장

양복 재단사 최고의 영예인 명장에 선정된 재단사는 전국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대구에서는 김태식(59·베르가모 김태식 테일러) 명장이 유일하다.

김 씨가 양복 재단 일에 뛰어든 것은 1967년. 15세 때다. 44년간 외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김 씨는 견습시절 한번 잡으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승부욕과 뛰어난 손재주로 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평균 7년에서 10년이 걸린다는 견습 꼬리표를 불과 2년 만에 뗀 김 씨는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상의공(上衣工)으로 발탁되는 등 일취월장했다.

그의 성공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번 바늘을 잡으면 부족한 부분이 보완될 때까지 거듭하는 근성과 눈을 감고 바느질을 연습할 정도의 장인기질, 민첩하고 세심한 바느질을 위해 잠잘 때 부드러운 크림을 손에 바른 후 목장갑을 끼고 잘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 등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20대 청년시절에는 1년에 200일 정도 밤을 새워 일할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 그 결과 입문 10년 만에 의복 공정을 지휘하는 선장 격인 재단사가 됐다. 비록 자기사업이 아닌 피고용인의 위치였지만 김 씨는 자기 이름을 걸고 옷을 만들었다.

1984년은 김 씨에게 잊지 못할 해다. 자기 이름을 단 간판을 내걸고 독립한 것. 동아양봉원 부근에 문을 연 '김태식테일러'는 열심히 노력한 결실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돈 버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1988년 재소자들의 재활을 위해 무료직업훈련에 나서면서 수많은 후진양성에도 땀을 흘렸다. 그의 이러한 피나는 노력은 2002년 마침내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오르며 결실을 맺었다.

"5년 전부터 맞춤양복을 찾는 손님들이 다시 늘고 있어요. 손님의 요구에 맞춰 유행에 맞는 스타일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독일서 발행되는 남성복 전문잡지인 '룬트샤우' 등을 매월 정기 구독하며 유럽의 양복 트렌드를 연구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의 제도작품도 싣고 있다. 최근에는 후진양성을 위해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양복실습교재 발간에도 열성을 쏟고 있다.

그는 얼굴 윤곽이나 신체구조와 조화를 이루는 옷, 편한 옷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옷을 연구하는 김태식 명장의 최고 옷 만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맞춤양복 외길 45년 고동수 씨

고동수(61·뉴 천기봉양복점) 씨는 16세 때 시골서 대도시로 올라와 잔심부름을 하며 양복에 입문했다. 양복과 씨름한 지 45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 이젠 천직이 됐다.

대구시 남구 이천동 대봉네거리에 위치한 뉴 천기봉양복점. 얼른 보기에도 1960, 1970년대 시내 어느 양복점과 모습이 똑같다. 다만 맞춤식 양복과 함께 수선과 세탁을 같이 한다는 것이 약간 다르다. 퓨전식 양복점인 셈이다.

고 씨는 "과거 전성기 땐 매월 100벌이 넘는 맞춤주문을 받았다"며 "한때 쇠락기를 거쳐 지금은 월 평균 20~30벌의 주문이 들어와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입소문과 소개를 통해 고객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외국인도 더러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직원도 1명 고용해 고객과의 납품 약속을 지키고 있다. 고 씨는 "100%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기성복과는 편의성과 내구성에선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단순한 가격 비교에서도 기성복과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양복의 질은 원단이 좌우한다. 고 씨는 구김이 없고 탄력이 좋은 원단을 고집한다.

실제 이곳의 양복 한 벌 가격은 20만~30만원 선으로 시중에서 세일을 할 때 기성복 가격이 35만~4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가격 경쟁력이 충분하다. 고 씨는 예전엔 품이 넓고 편안하게 입었으나 요즘은 몸에 꽉 맞는 곡선미를 살린 스타일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돈만을 생각했다면 이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객이 저를 잊지 않는 한 오직 한길을 걷겠습니다."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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