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 제2부-신라정신 2)분열과 갈등을 하나로 묶은 元曉②

입력 2011-05-06 07:44:37

변방 신라서 꽃 피운 불교사상, 중국넘어 원조 인도까지 가르침

포항시 오천읍 오어사(吾魚寺) 경내에는 원효가 쓴 삿갓 등이 전시된 유물 전시관도 있다.
포항시 오천읍 오어사(吾魚寺) 경내에는 원효가 쓴 삿갓 등이 전시된 유물 전시관도 있다.
포항시 오천읍 오어사는 원효와 혜공 스님간의 \
포항시 오천읍 오어사는 원효와 혜공 스님간의 \"내 물고기\"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원효 (617-686)
원효 (617-686)
원효가 열반한 곳(혈사)으로 추정되는 경주 함월산 자락의 골굴사. 절벽 곳곳에는 동굴이 있다. 사진 이채근기자
원효가 열반한 곳(혈사)으로 추정되는 경주 함월산 자락의 골굴사. 절벽 곳곳에는 동굴이 있다. 사진 이채근기자

"너무나 위대하고 뛰어나다"

6세기 신라의 한자문 정착에 대한 연구 글을 쓴 경북대 주보돈 사학과 교수는 원효에 대해 "위대하고 뛰어난 분이며 특히 언어에 대해서는 탁월했다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원효의 뛰어난 언어 재능은 아들 설총(薛聰)에게로 이어져 이두문(吏讀文)의 집대성도 가능했을 것이라 강조했다. 설총의 업적은 우리 문자 역사상 한글을 창제한 세종 대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불교를 완성한 元曉

주 교수는 신라는 백제를 통해 중국과 접촉했기에 백제에 의한 다소간의 왜곡이 있었겠지만 629년 당나라 요사렴(姚思廉)이 편찬한 양(梁)나라의 정사(正史)인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신라인들이 6세기 초까지 문자를 전혀 알지 못한 것'처럼 기록(無文字 刻木爲信 言語待百濟而後通焉)될 만큼 당시 신라의 한문자 구사능력은 실제 그리 높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 뒤 원효는 한자로 된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중국과 인도로까지 전파돼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끼쳐 신라인의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주 교수는 6세기의 신라관직과 관등, 지명, 인명을 통해 한문자 정착 정도를 살펴보면 "율령발표(520년), 불교공인(527년) 및 확산 등으로 한문자 구사능력이 상당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에 유학하지 않은 원효가 7세기 중엽 독자적인 교학사상(敎學思想)을 꽃 피울 수 있었을 것"이라 분석했다. 원효의 뛰어난 한문자 구사능력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의 암호를 해독해 김유신(金庾信) 군대를 위기에서 구해낸 사례에서 잘 나타났다.

지난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원효대사 특별전'에서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 성사 오른쪽에 가는 선철(先哲)은 없다'고 했다"며 "원효의 교학과 사상은 한국불교사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고 세계 불교사에서도 우뚝 솟은 봉우리"라고 평했다.

그의 사상과 정신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선교합일(禪敎合一), 조선 최제우(崔濟雨)의 동학 이념인 인간중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간 것 같다고 위덕대 채종한 교수는 진단했다. 채 교수는 "원효는 누구보다 앞서간 혁신가"라 평했다.

최남선(崔南善)은 "불교의 진정한 생명은 불교의 구제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이론과 실행이 원만히 융화된 조선 불교의 독특한 건립을 성취하였음에 있다. 인도와 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에 대하여 조선의 최후의 결론적 불교를 건립하였음에 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대성(大聖) 원효이다"고 주장했다.

◆원효에게 영향을 준 선지자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은 527년 법흥왕 시절,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됐다. 출발은 늦었지만 나라 안팎에서 승려들의 활약은 빛났다.

원효가 스승없이 스스로 배웠지만(無師自得) 그에게 영향을 미친 앞선 선지자들은 분명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원효도 있었다. 원광(圓光'532~630)과 자장(慈藏'608~677)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을 밑거름으로 나라 밖에서는 왕자 출신으로 자신이 수행하던 중국의 구화산(九華山)을 불교성지가 되도록 한 김교각(金喬覺'697~794), 바다로 최초의 인도 구법에 나선 혜초(慧超'704~787) 등이 신라 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원효의 선지자들 중 우선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시하면서 살생을 금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계(戒)를 어기고 가려 죽이도록 '특별한' 해석과 함께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계를 내린 원광과 선덕 여왕에게 황룡사 9층탑 세우도록 하는 등 신라를 불국토(佛國土) 나라로 만들려 했던 자장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원광의 시각은 독특했다. 조국의 부름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그는 신라 젊은이들에게 다섯가지 계율(五戒律)을 제시했다. '임금을 충성으로 모시고(事君以忠), 부모는 효로 모시고(事親以孝), 친구는 믿음으로 사귀고(交友以信),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며(臨戰無退), 생물은 가려서 죽여라(殺生有擇)'이 그것이었다. 유교에 바탕을 둔 불교적 계율이었다. 불살생의 계율과는 달리, 살아있는 것을 죽여야만 할 입장이면 반드시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색다른 해석이었다.

그는 또 왕명으로 수(隋)에 고구려에 맞설 원군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도 썼다. 그의 시각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려는 것은 사문의 행(行)일 수 없으나, 빈도(貧道)는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水草)를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命)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사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불교적 국가관을 강조했고,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불교의 토착화를 꾀했다.

원효에 앞서 서민불교의 시작은 보덕(普德),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에서 나타났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 경우 원효에게 열반경을 강의했으며, 혜숙 혜공 대안 등은 허위와 가식, 아집과 집착의 굴레 속에 갇힌 당시의 귀족들과 승려들에게 무소유와 무집착의 참다운 삶을 보여주며 원효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혜숙은 시골로, 서민들의 삶 속으로 온몸을 던졌고, 귀족집 심부름하는 고용살이 노파의 아들인 혜공은 조그마한 절 부개사(夫蓋寺)에 있으면서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술에 취했고 등에는 삼태기(궤:竹아래貴)를 지고 골목거리를 다니며 노래와 춤을 불렀는데, 부궤화상(負궤和尙)이라 불렸다. 대안 역시 장터거리에서 구리 바릿대(銅鉢)를 두드리며 '대안! 대안!'하고 외치고 다녔고, '금강삼매경'의 차례를 꿰마추라는 왕명을 받고도 왕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장바닥에서 순서를 맞추기도 하는 등 이들의 삶은 당시 귀족, 승려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원효에게 영향을 주었다.

유학을 떠난 신라승들의 개척·도전의식도 한몫했다. 신라의 입당구법(入唐求法) 유학파 승려가 180명, 인도로 떠나는 도축구법(渡竺求法) 유학승려 15명이나 됐다.

24세에 출가, 중국으로 건너가 30여년을 물과 백토(白土)로 연명, 수행하여 99세로 입적할 때까지 항아리 속에서 입적한 김교각은 당은 물론 신라에까지 알려졌으며 그가 수행하던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성지가 됐으며 지금도 중국 4대 성지의 하나로 해마다 수많은 참배객을 맞고 있다.

이처럼 신라는 불교의 땅이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경주를 묘사한 구절이 있다. '절은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가는 듯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원효 다녀간 길, 그 길 위에 서다

경북도청 미래전략기획단에서 최근 '원효사업' 담당을 맡은 김영경씨. 그는 "새로운 일로 가슴이 벅차다"며 가벼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사업은 우선 내년까지 경북도내 원효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흔적들을 연결하여 이야기가 있는 '구도의 길'을 조성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경산 자인의 출생지부터 경주에서의 수행생활을 비롯, 깨달음을 위한 당나로의 유학길, 무덤 속에서의 득도과정 등을 연결할 경우 전국 4개 시'도 및 13개 시'군'구 약 567km에 이르는 '구도의 순례길' 조성과 인근 원효관련 33개 사찰의 순례가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북지역 경우 18곳으로 가장 많으며 대구 5, 경기권 6, 충청권 4개소로 나타났다. 문화관광부의 원효 순례길은 경주를 출발, 탄생지인 경산을 거쳐 대구'칠곡'구미'상주'문경'충주'안성'평택을 지나서 화성에 도착하는 길이다. 경북도는 경북지역의 원효 관련 유적들 가운데 14곳에 이야기판을 설치하고 18군데에는 '구도의 길' 안내판을 만들고 스토리텔링 책자도 발간할 계획이다.

김상준 미래전략기획단장은 "기획단의 기획을 거쳐 해당 부서별로 개별사업이 이뤄지면 위대한 사상가 원효를 만나는 좋은 길이 생기고 관광발전에 큰 몫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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