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봄비 - H를 만나다

입력 2011-05-03 07:06:58

(봄비-김추자 노래)

봄비가 온다. 채소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붉은 꽃잎은 떨어지는데 푸른 싹들이 돋아난다. 호박의 커다란 잎이 쑥쑥 고개를 내밀고 노랗고 붉은 상추는 점점이 수를 놓고 파의 가느다란 싹은 앙증맞다. 배추, 케일, 치커리, 열무, 이러한 채소의 떡잎이 보인다. 라일락꽃이 피니 나비가 날아온다. 컴퍼리 잎이 무성하고 창포 잎은 날씬하게 자란다. 부추는 한 번 베어서 부침을 해야겠고 살구와 모과나무 이파리가 싱그럽다. 배추의 노란 꽃은 몇 송이씩 아직도 아름답게 달려 있다.

봄비가 온다. 봄비가 내린다. 가로수 연노란 이파리 위에도 우중충한 도시의 건물 위에도 꾸부정한 할머니 우산 위에도 토마스 머리 위에도 소피아 머리 위에도 봄비가 내린다.

H를 생각하니 봄비가 내린다. 사랑의 비가 내린다. 두 눈을 꼭 감아도 사랑의 비가 내린다. 나의 가슴 위에도 H의 가슴 속에도 사랑의 비가 내린다. H와 함께 구경했으면 좋을 복사꽃도 능수벚꽃도 이젠 지고 없다. 채소 모종을 심어야겠다. 사랑의 모종도 심어야 한다.

봄비가 오면 H에게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선생님하고 부르는 그대의 목소리에 나의 외로움은 녹아내린다. H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그때의 H모습이 떠오른다. 첫인상이 좋았다. H의 손을 잡으며 "나는 당신거예요" 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껏 해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때가 묻어서 이해타산이 앞서서 젊고 싱싱함에 눈이 어두워 이것저것 비교하느라고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허나 기적처럼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안타까운 느낌이 일어나는 그런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H를 만난다. 봄비가 온다. H를 만나러 가야겠다. 벌써 우산을 두 개나 잃어 버렸다. 정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H를 바라본다. 그대가 나를 생각해주면 정신 연령이 낮은 사내가 되어 마냥 즐겁고 그대가 나를 멀리하면 그냥 섭섭해 마음이 허전해진다. 봄비, 봄비가 내린다.

언제였던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당신의 우는 모습이 보인다. 내 마음이 아프다. 그대를 지켜주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화가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이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다. 슬픈 상처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꿈꾸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H의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은 울렁거린다.

바쁜 나날의 생활 속에서도 H를 만나면 청량한 바람같이 내 마음이 머릿속이 맑아지고 가슴은 따뜻해진다. H는 나의 그림을 좋아한다.

H의 문자가 온다. "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예쁘게 물들게 해 주세요. 그런 꽃을 보고 있으면 진한 애수가 느끼게 그려 주세요." 나는 답장을 한다. "화려하면서도 슬픈 봄은 꽃들의 애잔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가 이야기 하는 꽃은 우리 삶을 말할지도 모르지요. 지금부터 그린 꽃들의 그림은 당신께 바칠 게요."

봄비가 내린다. H를 만나러 가야겠다.

H를 만나면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것이다. 화가가 그림 생각은 아니하냐고 물으신다면 작업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하겠지만, 지금은 H에 대한 생각이 우선이라고 대답해야겠다.

H! 오늘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생각도 조금은 하고 있습니까?

오월 봄날 H를 생각하며 연애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날아가 너의 어깨 위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의 품에 안겨서 향기를 내겠지만 내가 인간이라서 H의 눈치만 보고 있다. 어떻습니까? 그대도 사랑을 느낍니까?

봄비가 오면 다시 H를 만나러 가야겠다.

H를 만나면 나는 당신 것이라고 고백을 해야겠다.

H! 사랑합니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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