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문화예술계에도 닥칠 수 있는 일

입력 2011-04-29 10:42:58

얼마 전에 지나간 메모장 한 권을 꺼내들었다. 어느 신문에 소개된 한 외국인이 이 메모장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메모를 읽으며 새삼스럽게 그 시점을 되새겨 본다.

2008년 2월과 3월에 걸쳐 일본의 역사도시 나라(奈良)에서 한 달을 보냈다. 앞서 짧게 세 번을 방문한 곳이라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때의 방문은 10년의 터울을 두고 이루어졌다. 나라를 기점으로 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의 유적과 박물관을 두루 다녔다. 솔직하게 말하면 유적과 박물관보다 답사 도중에 우연히 만난 현지 주민들과의 인사와 약속된 연구자들과의 간단한 술자리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일본 연구자들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아리송한 것도 늘어갔다. 우선 1990년대까지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반드시 나이 탓만은 아닌 듯하였다. 몇몇 기관에서는 한동안 신입사원이 없었던 듯 예전의 막내가 아직도 막내였고, 옮겼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오래전에 만난 연구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곳곳에 있는 지방의 박물관들에서는 90년대 후반 이후로 바꾸거나 수선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그간 일본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묘한 느낌이었다. 조금 답답하였으나 사적인 부분이 있었으므로 터놓고 물어볼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며 "아!"하며 길게 탄식을 질렀다. 저것 때문이었구나.

뉴스에 등장한 30대 후반의 젊은 정치인은 늙수그레한 이들 앞에서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오사카부(大阪府)는 파산한 회사이다. 수입이 없이 지출만 하는 시설 및 단체를 매각 혹은 폐지하겠다. 오사카유신(大阪維新)을 시행하고자 한다."

이 젊은 정치인은 하시모토 토루(橋下 徹)라는 오사카부의 신임 지사였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인 나이든 사람들은 고위관료와 오사카부에서 운영하는 시설의 관리자였다. 신임 지사는 정계에 들어서기 이전 일주일 내내 TV에 출연하며 법률상담 등을 하던 이른바 '예능인 변호사'였기에,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뉴스는 당시 오사카부의 부채가 5조 2천487억 엔이라고 했다. 이후에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공무원의 봉급과 복지 지원금이 대폭 삭감되었고, 공공시설에 수익 장치가 마련되었다. 또한 오사카부가 운영하던 여러 재단 가운데 10개를 폐지하고 18개는 민영화하였다. 민영화 대상은 주로 어린이체험교육시설, 미술관 및 박물관, 교향악단과 같은 교육문화 부문이었다. 반교육적이고 반문화적이란 비판이 있었지만, 그는 채무액을 무기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최근에는 기성의 정치질서가 잘 따라오지 않자 오사카유신회(大阪維新會)라는 지역정당을 출범시켜 올해 초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2개의 수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일본 정치계를 뒤흔들고 있다. 오사카부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이제 일본열도 전체로 확산되고, 덩달아 하시모토 지사의 정치위상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고 전한다.

일본 지방정부의 파산 원인이 정치인들의 과욕 때문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80년대의 버블경제 시절부터 '건설족'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장기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기 건설개발에 집착하여 수많은 장밋빛 계획이 실행되었다.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펼친 엑스포나 테마파크는 각 지방정부의 우위를 선전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일정부분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교육문화 인프라가 구축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버블붕괴 이후의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고, 지금에 와서 교육문화 부문이 재정 악화의 원죄인 것처럼 처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영화 이후에 직원 상당수는 공무원에서 위탁운영 재단의 단기 계약직으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 방식의 해결책이 일본의 교육문화계를 휩쓸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시모토 지사의 지향점이 그리 탐탁하지 않다. 우리에게 달갑지 않은 신우파적 정치성향도 그렇고, 어쩌면 취약할 수 있는 교육문화 부문을 위축시킨 정책은 그간 동북아시아에서 오사카지역의 문화예술단체가 거둔 성과로 볼 때 이토록 매도될 정도인지 의심스럽다. 오사카부의 재정악화가 비단 교육문화 부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사행산업인 카지노 유치를 주장하는 양면성은 가증스럽기도 하다. 오사카부의 문화예술계 상황은 조만간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 같기에 더욱 주목해야겠고, 아울러 마음이 아프다.

함순섭(국립대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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