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24)대구의 시가지 개발(하)

입력 2011-04-28 14:19:10

달성(達城)은 자연적 언덕을 이용하여 그 위에 쌓은 토성(土城)이다. 또한 달구벌(達句伐'대구의 옛 이름)을 상징하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과 홍보 부족으로 그동안 까맣게 잊혀 왔을 뿐 아니라,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놀이터이자 힘이 빠진 동물들이 엎드려 졸고 있는 나른한 쉼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역의 뜻 있는 사람들은 '달성공원'을 옛 이름인 '달성토성'으로 바꿀 것을 꾸준히 요구하여 왔다. 그와 함께 동물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인근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과 연계한 종합적인 복원계획을 마련함으로써 도심 재창조의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달성은 달구벌에서 축성된 최초의 성이다. 경주의 월성과 비슷하게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성으로, 삼한시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생활 근거지에 쌓은 자연발생적 성이라 할 수 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의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달성은 고려 중엽인 정종(1035~1046년) 때부터 달성 서씨의 세거지였다. 그들은 달구벌의 주요 지배 세력이었으며, 달성'동산'남산'계산동 일대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조선조 세종 때에 이르러 관아 부지로 결정되자 쾌히 내놓았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종손인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은 그 대신 주민들이 관아에서 빌린 환곡의 이자를 감하여 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그 같은 배려로 해서 서침 선생은 주민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옛 남산병원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 경상 좌도와 우도가 통합되었고, 감영이 설치되었으나 정유재란에 불타고 말았다.

성 안에 먹을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이곳저곳을 파 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곤란을 당하던 가운데 어느 집 주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인데 성 안의 어느 곳을 파 보라'고 일러주었다.

이튿날 사람들을 모아 꿈에 일러준 대로 파보았더니 물이 나왔고, 물맛도 차고 좋아서 영천(靈泉)이라 불렀다.

어느 날 조정에서 높은 벼슬아치가 오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물을 한 바가지 퍼 오라고 해서 달려가 물을 길어 올리니, 두레박 안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담겨 있었다. 쏟아버릴까 하다가 이전에 없었던 일이라 그대로 가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더니, 물맛이 참 좋다고 칭찬하면서 잉어는 음식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그 뒤부터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인원만큼 잉어가 나와서 '잉어샘'이라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없다.

1907년까지 달성의 한가운데는 갈대가 우거진 습지여서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었다. 특히 오르막길은 징검 돌길이 되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07년 일본 사람들이 기성회를 조직하여 단풍나무'벚나무'소나무 등 약 6만 그루의 묘목을 심었고, 조금씩 공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09년 1월 11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시찰했다. 그날 130년 된 가이즈카 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하였다. 그 밖에도 성안에는 느티나무'느릅나무'참나무'이팝나무'회화나무 같은 향토 수종의 다양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보호수로 지정된 것들도 적지 않다.

해방이 되자 새로운 모습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1948년에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시비가, 1958년에 어린이 헌장비가 각각 세워졌는데, 전국 최초의 일이었다. 뒤이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왕산 허위 선생과 이상용 선생의 뜻을 기리는 비석, 또한 대구에서 사형당한 수운 최제우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석재 서병오 선생을 기리는 예술비, 죽농 서동균 선생을 기리는 문화비, 달성서씨유허비(達城徐氏遺墟碑)가 세워졌다. 그와 함께 한옥 형태의 향토역사관이 들어섰다.

그 뒤 1963년 10월부터 새로운 공원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李玖) 씨가 대구 최초의 동물원을 설계하였으며, 1969년 8월 개원했다.

이듬해인 1970년 5월 2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이들을 위해 꽃사슴 다섯 마리를 기증하였다. 또한 한글로 쓴 '시민의 문'이라는 휘호를 받아서 새긴 현판을 공원 정문에 걸었다. 지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드나들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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