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슈바이처" "한국 의료사에 새역사를 쓰고 있는 인물"
지역 출신으로 북한 땅에서 인술을 펴고 있는 김정용(53) 개성협력병원(국제의료봉사단체인 그린닥터스가 개성공단에 설립한 병원) 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개성협력병원이 설립된 2005년부터 병원에 상주하며 개성공단에 근무하는 남한 근로자와 북한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김 원장에게 대구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태어난 곳은 영덕이지만 어릴때부터 대구에서 자랐다. 근무지가 개성이다 보니 김 원장은 대구에 올 일이 많지 않았다. 남한에 오더라도 서울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올해부터 대구행이 잦아졌다. 대구시의사회가 외국인근로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펼치는 의료봉사단의 부단장을 맡았기 때문. 먼길을 달려 개성에서 대구로 내려온 김 원장을 만났다.
◆"어릴때 꿈은 성악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김 원장의 꿈은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음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소질도 있었다. 음대 진학을 위해 1달 정도 개인레슨을 받을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자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해 음대 대신 서울대 공대 진학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러다 형의 권유로 서울의 모 학원에 모의고사를 치러 간 것이 계기가 돼 의대를 가게됐다. "처음 가본 서울은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서울에서 혼자 살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공대 대신 경북대 의대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서울행이 진로를 바꾼 셈이죠." 김 원장은 지금 생각하면 의대를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다. 조금은 우스운 이유로 서울대 공대 진학을 포기했지만 그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의학 공부하면서 인생관 변화
경북대 의대 78학번 동기들이 기억하는 김 원장의 모습은 한마디로 '범생'(모범생)이다. 공부와 신앙 생활이 학창 시절의 전부였던 그를 두고 동기들은 '착한 정용'이라 불렀다. 연구하는 의사로 남고 싶었던 김 원장이 공부에 매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대 공부를 하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몸을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영혼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명한 의사가 되기보다 봉사하며 사는 삶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한 뒤 전문의 과정을 밟지 않고 바로 의료 현장으로 나갔다. 의료 현장에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까닭이다. 1984년 시작된 김 원장의 야인 생활은 15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보건소'모자보건센터 등에서 근무하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곁을 지키다 1999년 41살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인도로 갔다.
◆말라리아 연구의 권위자
김 원장이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인도행을 택한 것은 신앙의 힘이 컸다. 의대에 들어간 뒤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 성경을 읽다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신앙모임에서 만나 결혼을 한 아내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도는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 축복의 땅이었다. 당시 캘커타 교민들 가운데 유일한 의사였던 그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의료 봉사뿐 아니라 선교 봉사를 통해 교민 사회에 큰 도움을 줬다.
또 그는 캘커타 의대에서 말라리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7년 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3만여 명의 말라리아 환자도 돌봤다. 그가 쓴 논문들은 권위 있는 말라리아 저널에 소개되기도 했다. 의대 입학 당시 연구하는 의사가 되겠다던 꿈을 인도에서 이룬 셈이다.
◆인도에서 개성으로
김 원장이 인도 생활을 청산하고 개성으로 간 것은 그린닥터스의 강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닥터스는 2005년 개성협력병원을 세운 뒤 적임자로 김 원장을 낙점하고 여러 차례 러브콜을 보냈다. "인도에서의 생활도 보람이 있었지만 우리 동포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린닥터스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개성에 가 보니 필요한 곳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성협력병원은 2007년부터 북한 의료진과 협력진료를 하고 있다. 김 원장은 협력진료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했다. "치료와 진료체계에 대한 안목을 많이 넓혔습니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북한 지역에는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립니다. 기침을 하면 남한에서는 감기를 의심하지만 북한에서는 말라리아를 의심할 정도로 남북한 의료 환경은 다릅니다. 우월 의식에 젖어 가르치려 하기보다 겸손하게 북한 의료에 대해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김 원장은 또 남북협력병원으로서 좋은 모델을 제시한 것은 개성협력병원이 거둔 중요한 성과라고 했다. "북한 의료진과 정보를 공유하며 협진을 하는 개성협력병원은 통일 후 남북한 의료진이 함께하는 병원을 건립하는데 좋은 케이스가 될 수 있습니다."
◆"대북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HELP"
김 원장은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의 입장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열었다. 그는 남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상생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남한의 대북정책이 'HELP'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HELP'는 말 그대로 북한을 도와준다는 뜻 외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김 원장이 말하는 'HELP'는 Health(의료)'Economy(경제)'Language(언어)'Politics(정치)의 앞글자를 딴 약자다. 김 원장은 대북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철자 순서를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북한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의료 지원이고 다음은 경제협력입니다. 북한에 개성공단 같은 것을 몇 개만 더 조성하면 남북한 협력관계는 더욱 공고해 집니다. 남북한 언어와 문화의 이질감을 없애는 일도 중요합니다. 정치는 대북정책에서 가장 후순위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북정책은 지나치게 정치 논리에 의해 좌우되고 있습니다."
◆"저는 코끼리 발톱 깎는 사람입니다"
김 원장은 개성협력병원에서 자신의 역할을 코끼리 발톱 깎는 일에 비유했다. 코끼리 발톱을 정기적으로 깎아주지 않으면 발톱이 살을 찔러 감염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제가 하는 일은 조그마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입니다. 코끼리 발톱 깎는 일에 불과할 정도로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코끼리(남북 관계)가 사망하는 일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제 역할은 작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 원장은 모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개성협력병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편안한 삶이 보장된 길 대신 인술의 길을 가면서 얻은 것은 사람이라고 했다. 개성협력병원에서 무보수로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람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움을 주니 도움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후원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 원장은 개성협력병원에서 일하면서 국제이산가족이 됐다. 아내는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완쾌되자 다시 인도로 돌아갈 만큼 봉사활동에 열정적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 부부는 너무나 닮았다. 두 아들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큰아들은 노팅엄 의대, 둘째아들은 킹스칼리지 치대를 다니고 있다. 김 원장은 자주 만나고 싶지만 서로 바빠 온 가족은 1년에 1번 정도 만난다고 했다. "아내가 있는 인도는 안방, 자식이 있는 영국은 작은방, 제가 있는 개성은 건넌방이라 생각하며 넓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가족과 떨어져 지내지만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사람을 돕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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