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토록 어두운 눈빛으로/ 언제나 나를 바라보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나/ 몰랐었다. 그때는/ 안개에 싸여 있듯 내 마음이 어두웠기 때문에….' 3명의 아이를 잃었던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는 그 아이들을 그리며 425편의 시를 남겼다. 3살 난 아이를 잃은 구스타프 말러는 이 425편 중 5편을 골라 곡을 붙였다. 이렇게 만든 곡이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이다. 위의 글은 그 두 번째 곡인 '왜 그토록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는지'의 시이다.
수필가 류달영은 '슬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초등학생도 안 된 아이가 신장 종양이라는 불치병을 선고받은 날 그 슬픔을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어떤 죽음도 슬프지 않은 것은 없지만, 아이의 죽음을 바라봐야만 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어떤 필설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올해 들어 4명의 카이스트 학생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초'중'고 시절, 부모의 더없는 자랑이었을 젊은이들이다. 잘 자라주었더라면 중추적인 자리에서 과학입국을 선도했을 영재들이다. 예기치 못한 아이의 죽음에 억장이 무너졌을 부모를 떠올리면 가슴만 먹먹하다.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세세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경쟁력을 키운다는 이유로 오로지 '열공'만을 외친 서남표식 대학 개혁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2006년 취임한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이명박 정부 교육 개혁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정부가 지원금을 무기로 각 대학에 입학사정관제 확대를 옥죄기 전에 모든 신입생의 입학사정관제 선발을 선포했고, 전 과목 영어 수업, 기업식 성과주의 도입으로 교수 간 경쟁을 강화했다. 그리고 성적에 따른 차등 등록금제를 도입했다. 이러한 조치는 경쟁력 강화만 외쳤을 뿐 어느 대학도 하지 못한 것이어서 '과연 서남표'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카이스트는 국내 대학 개혁의 상징이 됐다.
이미 4명의 목숨을 희생한 지금, 이 개혁은 무차별적인 비판의 대상이 됐다. 물론 학생의 죽음과는 별개로 대학의 경쟁력 강화는 계속돼야 하고, 이것만이 우리나라 이공계를 살리는 길이라는 주장도 많다. 또 이번 사건으로 대학 개혁이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모두 일리 있다.
하지만 어떤 개혁이나, 주장도 사람 목숨보다 귀하고 무거울 수는 없다. 아직 꽃피지도 못한 젊은이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개혁이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지금보다 더 치열한 경쟁사회가 된다 하더라도 이런 식은 옳지 않다. 그들의 죽음은 경쟁에서 뒤떨어진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온갖 사랑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라 좌절이나 실패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산 비극의 결과물이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서 총장은 국회에 출석해 국회의원의 질타를 받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사임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이에 맞춰 카이스트 측은 차등 등록금제 폐지를 비롯한 몇 가지 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거둬들였다. 내용에 일부 오류가 있다는 이유였지만 국회의 질타로부터 무사히 벗어났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실제로 내내 침통한 표정이던 서 총장이 국회를 나서면서 '선방했다'는 관계자의 말에 함께 웃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서 총장도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예도 학생들의 목숨보다 앞세울 수 없고, 부모의 절망을 한 치도 메울 수 없다. 서 총장이 무엇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부랴부랴 개선안을 내놓고 금방 거둬들일 정도라면 그 진정성도 믿기가 쉽지 않다. 옛말에 '만약 당장에 그만두면 곧 그만둘 수 있지만 그만둘 때를 찾는다면 그만둘 때가 없으리라(如今休去, 便休去, 若覓了時, 無了時)'고 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으로 돌이켜 볼 일이다.
鄭知和(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