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쓴 글이 과연 얼마나 정확하고 정직했는가에 대한 회의(懷疑)가 들 때다. 정확한 것이야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지만 정직한 것은 대체로 본인이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직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몽향(夢鄕) 최석채 선생님의 글은 후배 언론인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선생님은 당시 대구매일(현 매일신문) 주필이던 1955년 9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다 투옥됐다. 1960년 3월엔 조선일보에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사설로 4'19혁명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마침내 2000년에는 국제언론인협회(IPI) '세계 언론 자유 영웅 50인'으로 선정되셨다.
운 좋게도 선생님의 육필을 직접 대할 기회가 많았었다. 1980년대 초 수습기자 시절, 원고대로 문선공이 얼마나 정확하게 활자를 뽑았는지를 대조하는 교정부에 근무하던 때였다. 선생님이 '몽향 칼럼'으로 매일신문의 지가(紙價)를 높이던 때였다. 200자 원고지 6, 7매 분량의 선생님 원고지가 내 손에 들어오는 행운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의 원고지는 어떤 분위기(?)일까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원고지를 펴는 순간, 모든 생각은 달아났다. 깨끗하게 달필로 써 내려간 문장인 줄 알았는데 원고지라기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다. 자세히 보니 본문 문장을 두 줄로 지우고 원고지 행간 사이사이에 고친 문장을 써 넣은 것이다. 얼마나 많이 고쳤으면 본문보다 고친 문장이 훨씬 많아 제대로 읽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다. 그도 모자라 원고지 좌우 여백에다 화살표로 빼내 동그라미를 쳐서 그 속에다 고친 문장을 써 넣은 것이다.
일필휘지, 예쁜 원고지를 기대했던 젊은 기자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은 이내 감동으로 돌아왔다. 글 한 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쓰고 난 글을 다듬는 퇴고(推敲)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손수 보여준 것이다. 당대의 대가(大家)께서 그렇게 단어 하나, 토씨 하나를 서너 번 고쳐 썼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진다.
매일신문사 입구에는 선생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과 함께 안경 쓴 모습의 선생님 흉상이 있다. 어제가 서거하신 지 벌써 20주년, 선생님의 누더기 원고가 새삼 그립다.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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