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초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화구를 챙겨 차에 실었다. 제자와 함께 팔공산 너머 신녕면에 있는 한적한 농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야산을 양 옆구리에 끼고 아담한 저수지를 앞에 거느린 이곳에는 최근 귀농한 지인이 산다. 꽤 규모가 큰 축사에는 수천 마리의 병아리가 보금자리를 튼다고 했다.
우리는 이곳 병아리들이 살 집에 벽화를 그려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 외진 농장에 느닷없이 미술이 끼어든다고 생각하니 몹시 흥미로웠다. 겨울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감기처럼 온 대지에 퍼져 있을 때, 새로 올 수많은 생명들을 위한 그림 그리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따뜻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미술관 속 병아리들이라니 얼마나 신선하고 유쾌한 장면인가.
미리 답사를 와 전체 그림을 구상하고 거기에 맞는 재료도 준비가 된 터라 도착하자마자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하얗게 비어 있던 벽에 밑그림이 그려지고 아름다운 색들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지인과 가족들도 견디기 힘든 창작 본능에 사로잡혀 함께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었다. 어미 닭과 병아리, 매화나무와 별 나무를 그리고 큰 벽 하나 가득 채운 태양도 칠했다. 분홍 꽃이 송이째 날리는 마을이 있는 그림으로 차갑던 벽도 채웠다. 그래도 워낙 큰 농장 모든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청계원이란 농장 이름을 썼다. 이런저런 소감과 그린 사람들의 기념 서명도 했더니 황량하던 골짜기가 어느새 아름다운 봄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느 곳에나 서너 가지 색과 부드러운 선, 이미지 몇 개만 들어앉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미술의 놀라운 힘이다.
최근 병아리들이 입주를 완료해 잘 자라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귀엽고 노란 병아리 수천 마리가 쪼르르 몰려다니는 그림 농장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농장 주변에 100여 그루의 나무를 더 심었고 나무 울타리도 예쁘게 세웠다고 한다. 청계원은 자연과 사람, 동물들이 함께 행복하게 교감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장차 전원생활 체험학교로 가꾸어 갈 예정이란다.
이 봄 벚꽃과 진달래, 복사꽃과 이름 모를 들꽃들을 보러 나들이를 가는 분들은 한 번쯤 팔공산 저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신녕면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 내려가노라면 갑자기 그림으로 가득한 농장을 만나고, 그 속에 사는 여린 생명들의 합창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병아리처럼 순수하고 고운 전원 미술관 주인 부부의 환한 미소에 담긴 봄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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