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카럼] 플래카드가 아니라 票(표)다

입력 2011-04-11 10:53:46

흔히 맹세를 한다거나 약속을 다짐할 때 사람들은 '…무엇 무엇에 대고 맹세한다'거나 '무얼 걸고 약속할게…'라고들 한다. 자기 말이나 신용만으로는 안 믿어줄 때 끌어다 쓰는 말이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고' '내 명예를 걸고' '사랑을 두고…' 같은 것들이다. 그 중에 가장 신용이 떨어지는 것이 힘센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직(職)을 걸고…'다. 무엇 무엇을 못 해내거나 안 하면 '내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약속이다.

직을 건 맹세라면 상대적으로 직을 걸고 맹세할 만큼 그 약속이나 다짐 거리가 매우 중요하고 큰 가치 있는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직을 걸고 한 약속이나 맹세를 '번복'할 수 있는 것은 약속했던 일의 가치가 자기 자리 값어치보다 못할 때뿐이어야 맞다. 그게 아닐 때는 하느님, 명예, 사랑, 직위, 모두가 빈 약속을 위해 끌어다 써먹은 거짓 약속이 된다.

지도층의 빈 공약으로 신공항이 백지화된 뒤, 공허한 플래카드만 봄바람에 펄럭대고 있는 길거리에 또 다른 빈 약속이 나뒹굴고 있다. '백지화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한 밀양시장의 '직을 걸고…' 약속도 한 예다. 영남권 민심이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도 공인(公人)들이 공약을 공언(空言)한 데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국회서 국토해양부장관에게 빈 약속에 대한 10가지 죄목을 붙여 직(職)을 버리라고 몰아치는 와중에 오히려 직을 버리겠다고 공언한 지역 공인은 약속을 바꿔버렸다. 애당초 직을 건 일도 없는 국토부 장관이야 아무리 국회가 떠들어도 콧방귀도 안 뀌는 건 당연하다.

결국 공항 유치 재다짐을 이유로 번복한 빈 약속 바람에 타 지역 국민들의 공감대 얻기조차 쉽잖게 됐다. 밀양 시장더러 당초 약속대로 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지역 이익을 지켜내야 할 대표로서 오죽하면 직까지 걸겠다고 했을까라는 충정으로만 이해해주고 싶다. 영남 땅에 함께 사는 이상 한편이 돼 마음으로라도 거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앞으로의 유치 투쟁을 위해 지역 지도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변해야 한다는 충고의 뜻에서 고언(苦言)을 드리는 것이다. 앞으로는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 만만찮은 처신과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 봐! 하는 짓이 시골 티 나잖아'라는 빌미를 주면 점점 촌뜨기 대접받고 따돌림당하고 무시당한다. 서울 권력자들은 거짓 공약을 해도 나는 같은 짓 따라 하지 않는다는 의연함, 함부로 혈기나 치기 어린 빈말을 던지지 않는 지역 지도자다운 처신, 그게 수만 개의 플래카드 구호보다 낫다.

영남 시도민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지난 세월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수없이 되풀이해온 버릇이 있다. 잠시 부글부글하다 앞서 팽당한 거짓말은 쉬 잊고 그 다음 거짓말만 붙잡고 흥분하고 성낸다. 중앙의 눈치 빠른 정치꾼 권력자들은 그걸 알고 또 이용해 먹었다. 지금 우리가 다지고 경계하자는 건 바로 그런 과거의 정치 의식 패턴을 깨자는 거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잊고 순진하게 또 속아 넘어가는 미망(迷妄), 그 묵은 체질을 깨는 것이다.

'지역 분쟁에 끼지 말라'는 청와대 한마디에 숨죽이고 있다가 민심이 드세게 끓자 뒤늦게 얼굴 바꾸고 길거리로 나온 일부 카멜레온 국회의원들, 그래도 금방 식고, 잊고, 몰표 찍어줘 온 우리다. 위쪽 타지 사람들은 그런 걸 의리가 아닌 시골 티 낸다고 빗댄다. 그걸 한두 번 겪고 들었던가.

미국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연설 때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약속을 팔고 다닌다든가 거짓말하는 것이 편리한데다 경솔하고 순진한 유권자들의 표를 얻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팔고 다닌 약속 역시 화풀이할 줄 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눈여겨볼 구절은 '경솔하고 순진한 유권자'와 '빈 약속도 화풀이한다'는 대목이다.

지난 수십 년 우리는 경솔하고 순진한, 아니 어리석고 바보 같은 유권자였다. 그들의 빈 약속에 제대로 '화풀이' 한번 시원히 해본 일도 없다. 신공항이 정말 절실한 과제라면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 격인 길거리 플래카드는 싹 다 걷어내고 어깨띠도 벗어던지고 '직을 건다'는 헛맹세 대신 식지 않고 잊지 않는 뚝심으로 표(票)나 '단디' 쥐고 기다리는 게 옳다. 그래야 더 이상 시골 촌뜨기 취급 안 받는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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