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 장지종 중소기업연구원장

입력 2011-04-08 07:20:46

"동반성장, 대기업의 인식 먼저 바꿔야"

중소기업연구원(KOSBI)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역할과 비중이 확대되면서 이에 맞는 중소기업의 경영전략과 정책개발을 연구하기 위해 1993년 설립됐다. 대기업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에 있는 한국경제연구원(KERI)의 카운터파트너인 격이다.

2009년부터 중소기업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장지종(61) 원장은 그런 면에서 최고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행시 14회에 합격한 뒤 2003년 중소기업청 차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대부분의 공직을 중소기업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1975년 상공부 중소기업정책과 사무관을 시작으로 중소기업정책과장, 중기청 지원총괄국장'중소기업정책국장,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한데 이어 2003년부터 6년간 중소기업중앙회 상근부회장도 지냈다.

"얼추 따져보니 중소기업과의 인연이 36년이나 됐군요. 공직에 있으면서 중소기업 업무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연구원에 와서는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에게 현장성 있는 맞춤형 정책을 강화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어요."

중소기업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청 설립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96년 1월1일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공업진흥청을 대신할 중소기업 담당 부처를 만들 계획이니 빨리 들어오라더군요. 그래서 밤을 새워가면서 한 달 반만에 골격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관련 법, 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당연히 화제가 대기업-중소기업의 동반성장으로 이어졌다.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대기업의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거래관계는 공정하게 해야 하고, 애써 개발한 기술을 탈취하지 않으며, 중소기업이 쌓아 놓은 사업영역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진입해서는 안 됩니다. 중소기업들의 피해의식은 상상외로 큽니다."

그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들고 나온 초과이익공유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이 제도가 합리적인가, 중소기업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이 개념만 갖고 논쟁을 벌여 안타깝습니다. 언론도 정치인들의 발언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안이 마련된 뒤에 충분히 논의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이와 관련,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달 31일 한국여성경제인협회, 벤처기업협회 등 7개 중소기업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중소기업동반성장추진위원회' 출범식을 가졌다. 위원회는 민간자율적인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문화를 성공적으로 정착'확산시키기 위해 중소기업 단체, 협동조합, 수탁기업체협의회, 학계'전문가 등 53명 위원으로 구성했다.

그는 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재직 시절에는 초중고 교사들을 위한 연수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구직자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 봅니다. 각급 학교 교과서에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 제일 큰 산, 제일 큰 집만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알면 우리나라의 기업가 정신은 저절로 높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우연하게도 그의 고향 인근에도 중소기업을 위한 공업단지가 조성돼 있다. 총 60여만 평의 부지에 100여개 기업이 들어선 경주 천북산업단지 인근 성지리가 그의 유년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줄곧 서울에서 살면서 수도권에 점점 뒤처지는 대구경북이 항상 안타까웠습니다. 대구경북이 과거에 얽매이지않고 과감하게 진취적으로 변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고향 발전에 기여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쉽습니다."

천북초교'경주중'경주고를 거쳐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1년 미국 캔자스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에는 주 이란대사관 상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3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가 됐는데 아내가 더 근무할 수 없느냐고 하더군요. 해외파견 수당도 없이 한국에 돌아가서 박봉으로 다시 살 생각을 하니 막막했겠지요. 1994년 올해의 공무원으로 뽑혔을 때 부부 해외여행 특전을 받고도 예산 쓰기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안 갔던 일도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기만 한 일입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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