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역할'까지 했는데 뇌출혈에 정신도 잃어
"상철아! 상철아!"
5일 오후 대구의 한 대학병원 4층 입원실. 침대에 누워있던 설동석(가명'49) 씨는 갑자기 아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주변에 보호자들이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 씨는 군 복무 중인 둘째아들의 이름을 자꾸 외쳤다. 아무리 불러도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여동생 설미순(가명'47) 씨는 "오빠가 뇌출혈로 쓰러진 뒤로 몸도 정신도 마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듬직했던 설 씨는 사고 이후 어린아이가 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억을 잃은 아버지
"내 딸 아이가, 우리 딸 상미." 설 씨는 간호사를 자꾸 큰딸 상미(가명'23)라고 불렀다."에이, 어제는 저를 알아보시더니. 오늘은 왜 딸 이름을 부르세요." 간호사가 안타까운 웃음을 지었다.
설 씨는 지난해 11월 25일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이곳 병원에 실려왔다. 주류 회사에서 배달하는 일을 했던 설 씨는 그날 아침에도 평범한 일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의 아침은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 됐다.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한동안 중환자실에 신세를 지다가 일반 병실로 옮겨왔다.
설 씨는 묵묵히 가정을 지키는 버팀목이었다. 8년 전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떠난 아내를 대신해 상미 씨와 아들 상철(가명'22)씨를 키웠다. 경남 합천에서 택시 운전을 하다가 경북 고령으로 두 남매를 데리고 이사했다.
아내의 흔적과 그간의 힘들었던 기억을 다 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고령읍내에서 구한 25만원짜리 월셋방이 세 식구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됐다.
설 씨는 고령에서 식당에 주류배달하는 일을 했다. 무거운 주류 상자를 하루에도 수십 박스씩 어깨에 짊어지고 날랐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150만원을 벌었고 그 돈으로 두 남매를 입히고 먹이고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아버지라는 삶의 무게였다.
◆아버지, 아이가 되다
상미 씨는 아버지를 무뚝뚝한 사람으로 기억했다."참 말이 없었던 분이었어요. 일을 하다가 다쳐도 가족들한테 절대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맥주 박스를 나르다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도 입을 다물었다. 자녀들을 걱정시키는 아버지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 다리에 있는 상처를 발견한 상미 씨가 물으면 그제서야 "조금 다쳤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날 사고 이후 아버지는 아이가 됐다. 몸 왼쪽이 완전히 마비됐고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볼 때도 여동생 미순 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신체적 조건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도 어린아이가 됐다.
좀체 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퇴근길에 상미 씨가 병실에 찾아오면 환하게 웃었으며, 딸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매일밤 올 수 없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아들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상철 씨는 12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이틀 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부대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군인이 된 아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보고 목놓아 울었다. 아버지의 사고는 군인인 아들에게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만큼이나 아픔이었다.
◆"아프면 끝이에요"
현재 설 씨 앞으로 청구된 병원비는 약 2천만원이다. 4차례 수술을 하며 쌓인 병원비와 넉 달간 입원비가 3천만원을 넘어섰지만 그중 1천만원만 해결했다.
설 씨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고령군청에서 긴급의료비 300만원을 지원했고, 설 씨의 맏형이 주변 사람들에게 빚을 내 700만원을 어렵게 마련했다.
기초생활수급자였다면 수술비와 입원비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을텐데, 근로능력이 있는 아들과 딸, 그리고 매달 150만원의 소득이 있었던 설 씨는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이 아니었다.
쓰러진 아버지의 책임감은 이제 상미 씨 몫이 됐다. 상미 씨는 석 달 전 대구에 있는 간판 제작업체 사무실에 취업했다. 이곳에서 상미 씨는 간판 주문 전화를 받고 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한다.
고령에 있는 월셋방을 빼고 대구로 아예 옮겨온 것도 아버지를 곁에서 돌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간호를 고모 미순 씨에게 맡겨두고 일을 하고 있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서 손에 쥐는 돈은 100만원이 채 안된다.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년을 모아도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나마 기댔던 산업재해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됐다. 설 씨 가족은 3일 전 "근무 중 사고를 당하긴 했으나 입사 전부터 고혈압을 앓아왔던 설 씨가 스스로 건강 관리를 하지 못한 책임이 더 크다"는 통보를 받았다. 재활병원으로 옮기고 싶어도 밀린 병원비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아프면 끝이에요." 설 씨 가족이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의 '가난'이 아니다. 상미 씨가 매달 버는 100만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병원비가 몰고올 미래의 '가난'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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