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중소도시 지역에 산부인과가 없어 출산을 하려면 인근 대도시 병원으로 이동해야 하고, 공중보건의 부족으로 보건지소에서 의사를 만나기 힘들다는 보도가 있었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산부인과를 전공하려는 지원자가 줄어들고, 의과대학이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바뀌면서 공중보건의가 줄어들어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1970년대만 해도 의사가 귀했다. 전국에 무의촌이 여러 군데 있었다. 정부는 무의촌을 해소하려고 수련의들이 전문의 시험을 치르려면 6개월간 무의촌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나도 전문의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무의촌 생활을 했다. 임지로 간 무의촌 보건지소는 한산했다. 하루에 네댓 명 정도의 환자가 올 따름이었다. 아는 분을 아실 것이다. 신경외과 수련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무의촌에 오니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잠을 한 없이 잘 수 있어,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어, 흥분하고 감격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보건지소 앞의 이발소 아저씨가 보건지소 문을 황급하게 두드리면서 "지금 집 사람이 아기를 낳으려고 하니 아기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리둥절했다. 신경외과 수련의인 내가 애기를 받아야 하다니. 어찌되었건 급하다고 하니 산모를 돌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턴 수련을 받으면서 아기를 받았던 경험을 떠 올렸다. 분만에 필요한 의료기구들을 준비해서 산모 집으로 갔다. 운이 좋게 초산인 그녀한테서 예쁜 딸을 성공적으로 받아냈다.
그 일이 소문이 났는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밤중에 아기를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번에는 지난 번과는 터무니없이 다른 난산(難産)이었다. 산모가 힘을 쓰면 아기가 산도로 내려왔다가는 힘이 빠지면 다시 자궁 속으로 올라갔다. 거의 두 시간이나 용을 썼는데도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산모가 기진맥진하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당황하여 산모의 남편을 찾아 빨리 택시를 대절하도록 했다. "조금만 늦게, 조금만 참아. 병원에 다 왔어"라고 기도하며 병원으로 달렸다. 산모는 병원에 도착하여 다행스럽게도 난산 끝에 남자아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아련하고 그리운 시절이다. 꿈이 있었고 가슴 속에는 희망이 들어차 터질 듯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 곳에 사시는 분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신경외과 수련의인 나에게라도 애기를 받아달라고 요청해야 할 입장이었으니. 그런데 지금 그러한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모든 제도가 잘 정비되어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가 아이를 받고, 잘 교육된 의사들이 고향을 지키시는 분들을 돌보아 드렸으면 한다.
임만빈<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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