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 6'25전쟁 가시밭길 속 '세상의 복음화' 앞장
8일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주년을 맞는 대구대교구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뿌리이자 한국 근대사의 큰 줄기로 평가받고 있다.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대구대교구의 역사와 역대 대구대교구장의 활약상, 다가오는 100년의 전망 등을 게재한다.
지난 100년 동안 세상 속에 대구대교구, 대구대교구 속에 세상이 있었다. 대구대교구는 1911년 조선교구에서 분리된 이래 대구의 근대화, 나아가 한국의 근대화와 궤를 같이 해왔다.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산업화 등의 과정에서 때로는 시련도 있었지만 복음화의 길을 오롯이 달려왔다. 대구대교구는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종교 본질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등 사회복지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세상 속 대구대교구의 100년사를 요약해봤다.
◆일제 강점과 대구교구의 설정기(1911~1945년)=1904년 경부선 철도가 대구를 통과하면서 대구는 우리나라 3대 경제시장으로 급성장한다. 대구 천주교도 1902년 당시 경북 담당 사제 김보록 신부에 의해 계산동 대성당이 세워지는 등 교세가 날로 커진다. 계산동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면서 대구 천주교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대구대목구는 1911년 4월 8일 교구로 설정되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대구교구 설정에는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일제 탄압과 2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해외지원금 부족 등 어려움 속에서도 남산(현 중구 남산동)에 주교관(1913년)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191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분원(1915년), 성직자묘지(1915년), 성모당(1918년) 등이 세워졌다. 남산에 잇따라 세워진 서양식 건물들은 당시 대구가 기와'초가집 일색인 점을 고려하면 지역 근대 건축사에 상당한 의미로 다가온다.
1939년 교황청이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도 큰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다 떠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제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12세가 조선에서의 제사를 허용함으로써 천주교 신자 수는 크게 증가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악랄해져 대구교구는 상당수 교회 건물과 시설을 빼앗기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집단 감금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6'25전쟁과 대구교구의 정착기(1945~1962년)
해방 후 대구교구는 다소 어수선했다. 일제강점 말기, 일제의 강압으로 교구장이 프랑스인 무세 주교에서 일본인 하야사카 주교로 교체됐고 이후에도 교구장이 자주 바뀌었다. 1948년 최덕홍 주교가 교구장을 맡으면서 대구교구는 안정을 찾았다. 대구교구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기간에 평화와 복구를 위한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다. 언제 낙동강 방어선이 뚫릴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성모당 앞에는 평화의 기도를 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대구교구는 6'25전쟁 기간에 유일하게 북한군에 점령당하지 않아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천주교 교구로 활약했다. 함경남도 원산이나 서울 등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대구교구의 위상도 그만큼 높아졌다. 특히 북한군의 탄압을 피해 남하한 성직자들을 위해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설립(1952년)하기도 했다.
대구교구는 국가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있다고 판단, 교육 기관 설립에도 앞장섰다. 대건학교(1946년'대건중고등학교 전신)와 효성여자대학(1952년'현 대구가톨릭대)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또 출판과 언론의 중요성을 깨닫고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를 복간(1949년)하고 대구매일신문(현 매일신문)을 인수(1950년)했다.
◆경제 발전과 대구대교구의 성장기(1962~1986년)
1962년 대구교구는 일대 전기를 맞는다. 1962년 교황 요한 23세가 한국 교회를 정식 교구로 승격시키면서 3대 교구 중 하나였던 대구교구가 대구대교구로 설정된 것이다. 이로써 대구대교구는 명실상부 한국의 중추 교구로 자리매김한다. 대구대교구는 대교구 설정 이전부터 가파르게 성장한다. 교구 규모가 커지면서 1937년 전주와 광주 교구가 분리된 데 이어 1957년 부산교구 설정이 이뤄졌고 1969년에는 안동교구까지 설정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1962~1965년) 이후 대구대교구는 평신도 중심의 활동들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평신도의 날과 꾸르실료(천주교 신자들의 생활 쇄신을 위한 프로그램) 운동 시작, 전교의 달 설정 등이 이뤄지면서 기존의 성직자 위주의 교회 활동에서 신도들도 함께하는 교회로 거듭난다. 또 한국 교구 가운데 산간학교를 가장 먼저 시작(1970년)하고 주일학교 교재도 처음으로 발간(1971년)한다. 오스트리아 가톨릭으로부터 원조도 활발하게 이뤄져 파티마병원(1962년) 등 의료시설들을 잇달아 짓는다. 사회복지에도 눈을 떠 '교구 사회 복지회'의 전신인 '교구 인성회 연합회'를 발족(1979년)하기도 한다.
◆민주화와 대구대교구의 내실화(1986년~)
사회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거센 상황에서 대구대교구는 상대적으로 내실을 다졌다. 대구대교구 담당 지역에서의 성당이 크게 늘었고 월간잡지 '빛' 발간(1983년)과 대구평화방송 개국(1996년) 등을 통해 출판 및 언론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대구대교구는 한국 교회 최초로 '미사예물 공유제'와 '신부 세금 내기 운동' 등을 추진, '깨끗한 교회, 신자와 함께한 교회'로서의 이미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한국 순교 103위 성인이 시성되고(1984년) 교황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찾으면서(1985년) 사회적으로 시성 운동이 일어나는 등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다. 이 같은 흐름 속에 대구대교구도 1991년 관덕정 순교자 자리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순교 성지인 한티를 개발한다.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라는 주제로 제1차 교구 시노드를 열었고(1997년) 다른 종교와의 화합을 통한 사회 운동을 꾀하고자 대구종교인평화회의(DCRP)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도움말:서준홍 신부, 김정숙 교수(영남대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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