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권 신공항 건설의 무산이 지역감정으로 옮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이 지역감정이라면, 이것은 이번 백지화 발표에 따른 어떤 후유증보다도 근심이 되는 부분이다. 지역감정이란 어느 곳에나 있는 온건한 지역 정서가 급작스런 외부 충격을 받아 경직되면서 배타적인 형태로 노출되는 집단적 감정의 총체를 가리킨다.
지역감정이 발생되고 유지되는 정황은 그 지역 내에서는 피부로 절감할 만큼 뚜렷하지만 외부에서는 쉽게 간파되지 않는 법이다. 각종 지표나 언론, 여론과 소문을 자세히 살핀다고 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그 감정의 전모를 알아채기 힘들다.
내가 지금까지 정도 이상의 지역감정 현상을 체험한 일은 두 차례였다. 그 일을 통해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괴기한 감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호남선의 이야기다. 1990년대 후반까지 경부선 터미널은 현대식 건물로 세워져 번뜻한 데 비해 호남선 터미널은 시골 양철집처럼 조그마했다. 승객이 적어서 당연하겠거니 싶었는데 호남 사람들에게는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버스를 타고 고향을 오갈 때마다 피해와 모욕의 상징으로 각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에서 다섯 시간 동안 나에게 열렬히 성토하던 낯모르는 호남 사람에 의해서 깨닫게 되었다. DJ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호남선 버스터미널부터 허물고 재건축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두 번째는 나 자신이 서울에 살다가 대구로 내려왔을 때 목격했던 일이다. 100명 이상이 참사한 1995년 4월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는 당시 출범한 YS 정부를 한순간에 떠나보냈다. 지금도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침 출근 시간에 일어난 엄청난 참변은 무슨 이유로 보도가 지연되어서, 대구 사람들조차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소식을 듣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기겁했던 것이다. 70% 이상의 지지로 YS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한 대구는, 그 후 한동안 YS 정부와 철저하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때 처음으로 지역감정의 발생을 제대로 목격한 셈이었는데, 우리 현대사에 있는 숱한 집단적 감정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동남권 신공항에 대해서도 걱정스럽다. 일견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공항에 대한 영남권의 절실함을, 타 지역 특히 인천공항을 품고 있는 수도권 주민들은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바닥만 한 국토에 KTX까지 가설된 터에 어째서 대규모 지방 허브공항이 필요하냐고 어처구니없어한다. 그런 식이라면 땅이 긴 일본이나 넓은 미국은 각각 수십 개, 수백 개의 허브공항이 지어졌을 거라고 조소(嘲笑)한다. 지역 균형발전을 원한다면 공장을 지어달라고 해야지 어째서 대규모 공항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십수 년 전부터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수도권의 흡입력에 의해, 한때 한국의 양대 축이었던 영남권이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마치 수분이 말라 점점 건조사(乾燥死)를 하고 있는 개구리처럼 지방이 탈진 지경에 있다는 진실을 모른 체한다. 균형발전을 위한 어떤 노력도, 국내 기업을 유치하거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어떤 전략도 백약이 무효란 게 이미 입증되었다. 한 시간 거리의 일본에 가려고 다섯 시간 동안 이동해야 하는 판인데, 국내 자본이든 해외투자자든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나 입지 평가위원들도, 해외 출장이 잦을 때 6개월만 여기서 살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이런 비판에는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피해가기 어렵다. 유난히 부산을 떨었지만 단지 표를 의식한 탓이 아닐까 의심되는 이유는, 신공항 타당성의 조사 과정에서 별다른 막후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리에 나붙은 온갖 플래카드들, 부산과 대구의 노골적인 대립, 이곳을 기반한 박근혜 전 대표의 이해할 수 없는 곡예는 지역 상공인들과 지역의 앞날을 근심하는 시민들에게 상처만 안길 뿐이었다.
근거리에 공항을 얻어 뒤늦게나마 동남권 전체의 회생을 바라는 소망은 이제 접어야 하는가.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해외여행이 잦은 요즘, 공항으로 갈 때마다, 초가집 같은 '호남선 터미널'로 들어서던 호남인들의 심정처럼, 황량하고 비통한 굴욕을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