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개성 표출"… '수염족'이 늘고 있다

입력 2011-04-02 07:54:04

그냥 털이라 부르지 마라, 수염이 섭섭해 한다

가수 김흥국'박상민, 배우 차승원, 방송인 배철수'노홍철, 소설가 이외수, 국회의원 강기갑.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수염이다.

수염을 기르는 남자들(일명 수염족)이 많아지고 있다. 연예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수염이 대중화되고 있는 것.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번화가에 나가지 않더라도 수염 기른 사람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게 됐다. 온라인 동호회도 활성화되고 있다. 현재 포털사이트 다음에만 10개 이상의 수염 동호회가 결성돼 있을 정도다.

수염족의 증가는 수염에 대한 인식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권위와 카리스마,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인식되었던 수염은 이제 남성성을 강조하는 패션 아이템과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지저분하고 반항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자유와 세련미를 상징하는 코드로 수염이 부상하면서 수염에 매료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왜 수염을 기르나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세시봉 열풍을 타고 제2 전성기를 연 가수 이장희의 경우 입 주변 흉터를 가리기 위해 과거에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수염이 트레이드마크가 된 GOD 출신 가수 김태우는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 처음에는 산적같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체로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늘 한복을 입고 다니는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1980년대 말 '농촌총각 결혼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뒤 첫 쌍을 결혼시키기 전에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계기가 돼 수염을 길렀다.

송정흡(51) 경북대병원 산업의학과 교수는 2001년 미국 연수 당시 수염을 길렀다. 보일러를 고치러 온 멕시코계 미국인이 수염을 기르면 멋있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 단초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염 기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하루만 안 깎아도 덥수룩해지는 스타일이라 한번 길러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1년간 연수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수염을 깎지 않았다.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지만 3, 4개월 버티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10년 이상 수염을 기르다 보니 이제는 수염 없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하기 힘들다고 했다. 가끔 앨범에 꽂힌 수염 없는 옛날 사진을 보면 오히려 어색할 정도라는 것. 송 교수는 "제가 봐도 수염 기른 모습이 훨씬 보기 좋기 때문에 수염을 깎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고 말했다.

대구를 대표하는 성악가 최덕술(49) 씨는 1995년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제작한 푸치노 오페라 '라보엠'에 캐스팅되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뒤 처음 서는 무대였는데 본드를 사용해 수염 분장만 하면 알레르기성 재채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페라를 계속 해야 하니까 수염을 길러 보자고 결심했죠." 그는 몇 년 전 기르던 수염을 깎은 적이 있었는데 "수염이 없으니 이상하다"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 다시 수염을 길렀다고 했다.

디자이너 최갑운(29) 씨는 20대 초반부터 수염을 길렀다.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생각에 수염뿐 아니라 머리도 길렀다. 당시에는 손질도 하지 않고 수염이 자라는 대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 디자이너가 되면서 가위와 빗을 이용해 다듬는 정도의 수염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슬로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는 박홍규(59)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는 면도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수염을 기른 경우다. "수염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수염 깎는 것이 매우 성가십니다. 면도를 하다 상처가 나기도 해서 깎다 안 깍다를 반복하다 10여년 전부터는 깎지 않고 길렀습니다." 박 교수는 수염 관리를 따로 하지 않는다. 수염이 많이 자랐다 생각되면 거울을 보며 집에 있는 가위로 대충 잘라내는 것이 관리의 전부다. 그래서 그의 수염은 정돈된 느낌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연인의 삶을 추구하는 그의 이미지와는 잘 어울린다.

◆수염 때문에 생긴 해프닝

수염을 기르는 사람보다 기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니 수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송정흡 교수는 미술 전시장을 찾을 때마다 수염 때문에 예술가로 오해를 받는다. "얼마 전 지인과 함께 미술 전시장을 찾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겉 모습은 분명히 예술가인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술가들끼리는 서로 안면이 있는데 저는 일면식도 없으니 당시 전시장에 있던 예술가들은 저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 온 예술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그는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몇 년 전 시골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 주인 아주머니가 힐긋힐긋 쳐다 보았다고 한다. "왜 그러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인이 다가와 보일러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다는 것. 송 교수는 평소 보일러 광고에 출연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터라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최갑운 씨의 턱수염 길이는 7㎝ 정도다. 수염족 중에서도 비교적 긴 편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옷을 입을 때 가끔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지퍼가 있는 옷을 입을 때 지퍼에 수염이 걸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래서 그는 지퍼를 올릴 때 유난히 신경을 쓴다고 했다.

◆"수염 길러 보니 오히려 편해"

수염을 기르면 불편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수염족들은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으며 오히려 편한 점이 많다고 했다. 수염족들은 매일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편할 뿐 아니라 아침 시간도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또 수염이 이미지 메이킹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송정흡 교수는 이름 대신 '경북대병원 털보 교수'라고 말하면 바로 자신을 기억한다고 했다.

최덕술 씨는 "보통 수염이 있으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식사할 때 음식물이 묻어 지저분해 질 것 같지만 그런 일도 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술인으로 이미지 각인에 도움이 됩니다"고 말했다.

최갑운 씨는 수염 때문에 나이보다 어른 대접을 받게 돼 좋다고 했다. "사회생활 하면서 20대라고 말하면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이를 밝히지 않고 있으면 수염 때문에 30대로 보여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

수염 동호회 게시판에는 고충을 호소하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수염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조사가 있거나 명절 때면 수염족들의 고민은 더욱 심각해진다. 실제로 수염족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것도 사회적 시선이었다. 김신윤(54) 경북대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10여 년 정도 수염을 기르다 말끔히 정리한 것도 사회적 시선 때문이었다. 1997년 미국 연수 당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김 교수는 귀국해서도 수염을 기르다 2007년 결국 수염을 깎았다. 수염을 두고 말들이 많아 조직사회에서 일을 하려면 깎는 것이 편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최갑운 씨는 얼마 전 집안 행사를 앞두고 수염을 조금 잘랐다. 부모님은 수염에 익숙해져 괜찮지만 집안 어른들 가운데 못마땅해 하는 분이 있어 정리를 한 것이다. 그는 "대구의 경우 특히 수염을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부 시선에 일일히 신경쓰다 보면 생활이 안돼 요즘에는 무관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각자 생활하는 방식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박홍규 교수는 수염을 기른 뒤 불쾌한 기억이 많아졌다고 했다. 수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염 없이 매끈한 턱은 전체주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구한말 일제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조선시대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수염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수염을 보고 비위생적이며 비문명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시행된 획일적인 두발 단속도 수염=비위생=비문명이라는 일제강점기 전체주의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염을 기른 동기가 무엇이든 모두 자기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허구입니다. 수염조차 마음대로 기르기 힘든 사회는 성숙한 사회라고 보기 힘듭니다."

최덕술 씨는 "16년 전 처음 수염을 기를 때 젊은 사람이 건방지게 수염을 기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인데 사회 문제처럼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 남자가 기를 수 있는 수염은 구레나룻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가 개방되면서 수염족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 또는 예술인 등에 국한돼 있다. 직장인 가운데 수염을 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영업직에 종사하는 남자에게 수염은 절대 길러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 우리 사회에서 수염이 보편화되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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