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이 王이 되고, 王이 龍이 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경주 왕의 길은 반월성에서 시작해 안압지와 능지탑 황복사지를 거쳐 함월산을 넘어 감은사와 이견대에 이른다.
이 길은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신라로 잠입한 길이며, 문무왕의 장례길이다. 신문왕이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했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혁거세를 비롯한 '왕과 용', 그리고 '광명과 피리'이다.
이처럼 용이 왕이 되고, 왕이 용이 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이고 신라 사직을 누천년에 이어가기 위해 미래의 비전을 모색하던 길이다. 이 길은 용이 인도하고, 용이 수호하고, 용이 승천한 길이다. 그리고 용이 준 것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이다.
이후 이 피리는 왕이 된 사람만이 지닐 수 있었고, 이 피리를 넘겨받는 것은 하늘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왕이 된다는 것을 상징했다. 임금은 이 피리(만파식적)로 모든 세상의 슬픔을 치유했다.
◆왕의 길에 들어서다
월성에서 내려와 안압지를 지나 경주~울산 7번국도를 따라 울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문무왕이 승하한 후 화장을 한 능지탑을 만날 수 있다.
능지탑에서 너른 구황동 벌판을 한참 걷다보면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의 아들 효소왕이 세웠다는 황복사지가 나오고 선덕여왕이 잠든 낭산과 진평왕릉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신라 56왕의 숨결이 밴 길이다.
이어 보문호수를 낀 명활산성을 지나 보불삼거리에서 동해로 접어드는 왼편 길을 잡으면 덕동호가 눈에 잡힐 듯 들어온다.
덕동호 동편 끝이 보이면 추령(楸嶺)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토함산(吐含山)을 넘는 길과 추령재 길, 함월산을 넘어가는 길이 있다.
함월산((含月山'584m)은 달을 품고 있다고 해서 함월이다. 세 방향의 길 중에는 제일 왼쪽 길이다. 왕의 길은 행차가 항상 거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파른 토함산길과 추령재를 피해 산세가 비교적 넓게 조성된 함월산 길을 왕 행차길로 잡았다.
◆모차골과 서낭재
모차골에서 동해로 이어지는 이 길은 임금이 다니던 길이기도 하지만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라의 주요 방어선이었다. 그래서 항상 마차를 비롯한 군수품이 오갔다.
이 마을에 시집을 와서 60여 년을 살았다는 박수녀(79) 할머니는 "옛날에는 마차들이 오갔다고 해서 마차골이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모차골이 됐다"고 유래를 밝혔다.
모차골은 동해바다에 있는 문무왕릉을 알현하기 위한 신문왕의 마차행렬이 다닌 곳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과 수레들이 드나들던 골짜기로 마차의 발음이 전이돼 모차골이 되었다. 문무왕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와 나라를 위한 충의 얼이 깃든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계곡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참뽕나무와 층층나무, 어름, 다래, 자귀, 단풍, 제피, 쪽동백, 들복숭아, 제비꽃, 산벚나무…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들꽃과 희귀나무가 지천으로 널렸다.
계곡 따라 조성된 이 길의 특징은 경주에서도 가장 오지로 손꼽히지만 군데군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많다는 점이다.
불을 땐 흔적과 화전민이 일구었을 것으로 보이는 경작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사태를 막기 위한 석축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함월산 정상쯤으로 보이는 서낭재에 오르니 사방이 눈에 확 들어온다.
황룡계곡에서 서낭재로 오르는 길은 두 방향이다.
덕동댐 중간지점의 사시목(사방이 다 보인다는 뜻)에서 박수관 명창의 전수관이 있는 한티버든 쪽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하면 함월산 꼭대기인 서낭재에서 마주친다.
경치 좋고 자리 또한 넓어 이쯤에 주막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낙동정맥의 길목이기도 하다.
서낭재에 오르기 몇 마장 전쯤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기생무덤'이 있다. 과거 선비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가련히 세상을 버린 이 무덤에 꼭 술 한 잔을 치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무덤에 공을 들이면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운다는 속설도 있다. 이 길을 나서기 전에 막걸리와 요깃거리를 준비해 왔다면 여기서 목을 축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말구부리와 세수방, 불령봉표
서낭재를 넘어 오면 지금까지 평탄했던 길과 다른 가파른 길이 나온다. 말구부리다. 말 그대로 말이 구불러 떨어질 정도로 가파르다는 뜻이다. 어가행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난관에 봉착한다.
깎아지른 듯한 길은 곧이어 세수방에 당도한다. 문무왕 일행이 손을 씻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세수방이다. 특이하게 세수방만 떡돌로 만들어졌다. 3m 폭의 수정같은 냇물이 돌 세숫대야에 담겨 있다.
말구부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용을 쓴 탓에 땀이 비오듯 했다. 세수방 맑은 물에 손을 담그니 피로가 싹 가신다.
세수방을 지나면 정상 부근에 봉표가 길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불령봉표라고 하는 이 봉표는 효명세자와 연관돼 있다. 이 봉표의 존재는 조선 후기 비운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 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라는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봉표는 만파식적을 안고 돌아오던 시기와 1천200여 년의 시차를 가지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또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효명세자가 죽은 다음 해인 신묘년(1831)에 그의 묘에 사용할 제수에 필요한 경비를 기림사 일원의 산으로 정해 이 부근의 산에서 나오는 묵탄을 생산해 충당한 것을 기록하는 소중한 문자기록 유물이다.
연경은 조선왕조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인 효명세자의 묘호이고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었다.
◆만파식적과 용연을 만나다
불령봉표를 뒤로하고 다시 기림사(祗林寺)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당시 왕의 길은 어가행차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풍경은 그리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실망은 용연폭포에서 사라진다.
기림사를 지척에 두고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용연(龍淵)은 말 그대로 용이 놀다가 하늘로 곧바로 차고 오른 듯한 장엄함이 있다.
용연은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용왕으로부터 옥대와 피리를 얻어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태자 이공(理恭)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하는 "이 옥대에 박은 모든 장식은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용입니다"고 말했다.
왕이 옥대의 장식을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됐다. 이 못이 용연이다.
왕은 궁에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 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거센 물결을 자게 하는 젓대'(萬波息笛)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용연은 원래 원통처럼 앞이 막혀 있었는데,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치는 바람에 지금처럼 앞이 트였다는 것.
용연폭포와 기림사에서 잠시 쉬었던 발걸음을 재촉해 골굴사와 감은사 어일을 지나 이견대에 오르니 멀리 바다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묻힌 대왕암이 보인다.
용연은 경주의 청소년들에게 성인식을 치러주는 곳이다.
20세를 맞은 경주의 청소년들은 모차골에서 출발해 용연에 이르러 의복을 갖춰 입고 '빈'으로 청한 시장에게 "우리들의 관례를 주관하시어 장래에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며 차를 마신 뒤 성인으로서의 관례를 치른 곳이다.
최양식 경주시장은 "용연을 포함한 이 길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과 그의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를 기린 길이다. 이 길은 충과 효의 길이기 때문에 경주지역 청소년들은 성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충효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경주시 왕의 길 정비
경주시는 신라시대의 대표적 관문이었던 왕의 길을 정비한다. 이 길에 대한 테마는 충과 효이다.
경주시 문화관광과 박옥순 담당은 "누천년을 이어오면서 골짜기마다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면서 "시는 이를 단순한 역사유적 구경에서 역사문화유적과 자연생태가 어우러진 문화체험공간으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주시는 특히 기림사와 골굴사 등 사찰에는 템플스테이와 선무도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기림사~양북면 거리에는 신라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쉼터와 주막 등 다양한 체험거리가 있는 볼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 기생무덤과 말구부리, 말굽터, 숯가마터, 빨치산, 마장터, 늪지대, 야부네 등 이 길을 따라 펼쳐진 각종 야사들을 한데 묶어 체험 프로그램 개발에도 나설 예정이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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