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때 삼부녀 몸 던져 정절 지킨 연담소…예법과 풍속의 양반고을
낙동강이 안동 구담습지까지 굽이쳐 내려온 뒤 다시 서북쪽 예천 삼강 방향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목. 의성군 다인면 용곡리 동동·반용은 의성의 서북쪽 끝지점과 예천 풍양·지보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강물이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곳에 인접해 있다. 남동쪽으로 비봉산, 남서쪽으로 예천 풍양면, 동북쪽으로 예천 지보면, 북쪽으로 낙동강에 접해 있다. 마을 서쪽에는 뫼산이, 동쪽에는 연담산이 낙동강과 드넓은 대마들을 지켜보고 있다.
동동(용곡1리)과 반용(용곡2리) 마을은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가깝다. 이 마을에는 고려 말부터 남평 문씨가 대대로 살다 임진왜란 이후 모두 떠났다고 한다. 이후 1600년 초반 조선 광해군 때 좌승지 김진수가 광해정변으로 충북 제천에서 낙동강을 따라 피란처를 찾다 발견한 지역이 바로 반용(蟠龍)이다. 좌승지는 피란처로 삼은 이 마을이 산기슭에 길게 펼쳐져 '용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반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진수를 필두로 김해 김씨 후손들은 대대로 반용에 자리를 잡았다.
김진수의 6세손 김계조가 1700년대 말 인접한 마을로 이주한 곳이 바로 동동(東洞)이다. 동동은 고려 때 밀성고을(현 다인면 양서2리)의 동쪽에 있다고 동동이란 설과 반용의 동쪽이라고 동동이란 얘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반용과 동동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동동은 옛날 낙동강변에 남평 문씨의 정자가 있었다고 '문정자' 마을로도 불린다.
용곡리는 반용의 '용'자와 금곡(용곡3리)의 '곡'자를 땄다. 반용과 동동의 서쪽에 있는 금곡은 옛날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쇠실'로 불리다 소가 '쇠금'으로 한자화해 금곡으로 바뀌었다.
반용과 동동에는 남평 문씨와 김해 김씨 등 양반 가문의 후손들이 대를 잇다 보니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던져 정절을 지켰던 부녀자들과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고도 평생을 수절했던 효열부(孝烈婦)가 나왔다. 예법과 바른 풍속을 지키고 잘못을 바로잡는 독특한 청년조직이 한때 운영되기도 했다.
동동과 반용의 생계는 넓은 '대마(大馬)들'의 몫이다. 연꽃이 못 위에 떠 있는 모양의 연담산(蓮潭山)은 낙동강변 연담소 위에 홀로 서서 동동마을과 낙동강을 이었다. 연담산 앞을 지나던 물길은 제방을 축조하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동쪽으로 멀리 밀려났고, 마을과 강 사이에는 대마들이란 광활한 들판을 만들어냈다. 배추, 무, 뽕나무가 차지했던 대마들은 두 차례의 경지정리를 거쳐 대규모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천년을 이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고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가 이끄는 동로군은 부산 동래, 영천, 군위, 의성 비안을 거쳐 북쪽으로 치고 올라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중로군은 경남 밀양, 대구, 선산을 거쳐 북상했다.
4월 중순, 봄볕이 따스하고 강변에 봄꽃들이 활짝 피어날 무렵 동로군의 주력부대가 동동과 반용을 휩쓸었다. 왜군이 지나는 자리는 약탈과 살육이 횡행했다. 사람도 강산도 초토화됐다. 왜군이 이웃마을을 초토화시킨 뒤 동동에 진입했다는 소식에 세 부녀는 손을 꼭 맞잡았다. 낙동강 물이 깊은 연담소에 접한 벼랑 위였다. 세 부녀는 상기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연담산 아래 연담소 푸른 물은 세 부녀를 차례로 받아들였다. 왜군에 몸을 더럽히느니 푸른 강물에 몸을 맡겨 깨끗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남평 문씨 문경제의 부인 남양 홍씨와 그의 며느리 함양 여씨, 손녀 남평 문씨 등 3명이었다. 남양 홍씨는 남편이 왜적들에게 살해된 것을 보고 강물에 몸을 던졌고, 함양 여씨와 남평 문씨도 각각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자 통곡을 하며 연담소에 몸을 맡겼다고 한다. 남양 홍씨의 손녀 남평 문씨는 그때 꽃다운 17세였다.
660년 백제의 궁녀들이 나'당 연합군에게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피해 낙화암에서 백마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지 약 1천 년 만의 일이었다.
김종악(74) 씨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삼장고개를 넘어왔는데, 저놈들한테 맞아 죽니 여기서 죽는 게 낫겠다고 삼부녀가 여기(연담소)서 죽었다고 해서 비를 세웠는거라"라고 말했다.
1628년(인조 6년) 조정에서는 이 삼부녀의 일을 정렬문으로 새겨 널리 알렸다고 한다. 연담소 위에는 삼부녀정렬비(三婦女貞烈碑)를 축조했고, 동동마을 남쪽과 북쪽 끝 진출입로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하마비는 외지인들이 삼부녀의 정렬이 서린 이 마을을 드나들 때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춰 마을을 지나간 뒤 다시 말이나 가마를 타도록 유도한 것이다.
김건배(77) 씨는 "하마비는 정1품 되신 분들은 (마을을) 지나갈 때 10보 전에 내렸고, 정2품은 20보 전에서 내렸고, 그 뒤로 7품까지는 30보 전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게 있어요. 마을을 지난 뒤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거나 했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삼부녀정렬비는 원래 광해군 때 나무로 만들었다 영조 때 증축을 하면서 석재로 바꿨다.
김공배(82) 씨도 "정렬비 앞으로는 말도 못 타고, 어른들이 담뱃대도 못 물고 지나갔다는 걸 어른들한테 들었다"고 했다.
현재 동동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색바랜 삼부녀정렬비와 하마비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하마비 2개 중 북쪽에 있던 것을 1970년대 새마을사업 당시 마을길을 닦던 중 발견해 정렬비 옆에 세웠고, 남쪽 비는 여태 찾아내지 못해 문화원에서 새로 만들어 정렬비와 나란히 세워놓았다.
◆청년들은 풍속을 지키고, 열녀는 수절하고
고려 말부터 남평 문씨가 정착했다 조선 후기 김해 김씨 집성촌을 이룬 동동과 반용에는 '양반 동네'인 만큼 예의범절과 마을의 바른 풍속을 꼼꼼히 따졌다. 동동과 반용 사이 쇠실산 기슭에는 김해 김씨 입향조를 추모하기 위해 1800년대 지은 정자, 연안정(淵安亭)이 지금까지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정자는 김해 김씨 후손들이 문중 제사를 지내고, 동동과 반용의 젊은이들이 학문을 닦는 공간으로도 활용했다.
예법과 풍속을 엄하게 여기는 마을 분위기에 따라 '교풍회'(矯風會)라는 독특한 집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 마을 풍속을 바로잡는 것을 목적으로 청년들이 주축이 된 '교풍회'가 꾸려졌다. 교풍회는 당시 마을의 덕망 있는 어른들이 '동동과 반용 양 지역 청년들이 친목회를 만들어 마을 분위기를 다잡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서 출발했다. 교풍회는 회장을 비롯한 조직체계와 회칙을 마련해 초'중학교 선도부에서 마을 치안대 역할까지 맡았다고 한다. 매달 회의를 열어 예법을 어기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에 대해 선도활동이나 지도를 했다는 것.
김공배(82) 씨는 "양반촌이라 예법이 엄격했지. 마을의 미풍을 조성할라고 (교풍)회가 조직돼 있었지요. 스물다섯에서 삼십대쯤 됐지. 반용과 동동 합쳐서 한 30명 됐어요. 나쁜 짓을 하면 벌주고, 불 꺼놓고 패고, 죄질이 나쁜 놈은 쫓아내고 했지 뭐"라고 말했다.
김규영(83) 씨는 "글자 그대로 '바룰 교'잔데, 잘못하는 것은 고친다는 게 교풍회지. 그기 법이라. 한 15년에서 20년 정도 운영하다 88올림픽 몇 해 전에 없어졌지"라고 말했다.
교풍회는 그렇게 젊은이들이 나서 마을의 예법을 지키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나쁜 짓을 저지르면 바로잡거나 벌을 가하는 활동을 통해 공동체 문화를 이끌었던 것이다.
마을의 엄격한 풍속은 동동마을에 있는 열녀비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이 열녀비는 이 마을 김기분 할머니의 숙모인 안동 김씨가 구한말 반용으로 시집온 뒤 17세의 나이에 남편이 죽자, 평생 수절하면서 시부모를 봉양했다고 집안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최근 반용에서 동동으로 옮겼다. 반용과 동동에서는 이처럼 수백 년 동안 부녀자의 수절과 예법, 풍속을 엄하게 지켜왔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 (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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