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월급날

입력 2011-03-25 07:21:37

"아빠, 제가 첫 월급 타면 양주 사서 집에서 술 파티 열게요"

♥ 막내 내복 선물받고 좋아하신 엄마

내가 첫 월급 받던 그 날,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왕이셨다. 왕관을 쓰진 않았지만 고귀한 인품과 아름다운 미소로 진지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시던 모습이 꼭 여왕의 모습이셨다.

아들 넷, 딸 둘 중 언제 철들까 노심초사하셨던 막내인 내가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여 첫 월급을 탔다며 엄마에게 빨간 내복을 사다 드린 것이 엄마에겐 꿈만 같았던 것이다.

마흔 중반이 지난 나이에 나를 낳으셔서 기르신 그 보람이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엄마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월급날마다 엄마의 속옷, 양말 등 자잘한 기쁨이라도 되어 드리게 선물을 사 드렸는데, 두어 해까지 그 기쁨을 누리시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처음엔 엄마가 내복이 좋아서 그러신 줄 알았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선물을 거듭할수록 엄마의 전정한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아들이 힘들게 벌어서 사다준 것이 감사하고, 올곧게 잘 자라 주어서 감사하고, 그런 아들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모든 것이 감사했던 것이다. 지금쯤 살아계신다면 더 멋진 선물을 사다 드릴 텐데!

마침 오늘이 월급날이라 식구들과 외식을 하는데 옆에 앉았던 딸아이가 내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 제가 월급 타면요. 양주 사 드릴게요. 밖에서 소주 드시지 말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술 파티해요. 저의 남편이랑."

술을 자주 마신다는 아내의 잔소리를 맞받아 한 말이긴 하지만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딸아이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듬직한 아들과는 달리 애교 만점인 딸애가 첫 월급 타서 비싼 양주 사다 준다는 말에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보니 엄마 연세쯤 되면 기뻐서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월급날이라 기쁘지만, 엄마가 많이 그립다.

피재우(대구 수성구 만촌3동)

♥ "월급 받으면 좋은줄만 알았는데"

꼬박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일을 한 대가로 지급받는 것이 월급이다. 처음에는 월급 받는 날을 많이 기대했다. 잘 몰라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월급날을 고대하며 버틸 수 있었다. 내게도 드디어 월급을 받는 날이 생긴다는 생각에 감격스럽기도 했다. 저축하면서 돈을 불리고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을 하겠다는 다짐이 있었기에 월급을 받으면 내 생각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모님이 버는 것으로는 생활이 감당이 되지 않고 동생들은 고등학생, 대학생이라 등록금도 만만치 않다. 결국 내 월급까지 집에 보탬이 되어도 생활은 넉넉하지 않다.

상상했던 것처럼 내 월급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그러면서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을 해야 하는 책임감에 대해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에 월급을 받는 모든 이의 어깨가 무겁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월급으로 내가 자라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월급으로 나를 위한 투자를 많이 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고쳐먹기로 하고 계속 월급을 모으고 있다.

장희지(대구 북구 고성3가)

♥통장정리하고 나면…

월급날은 기쁨과 허무의 날이다. 아이들은 행복으로 포만감을 느끼지만 어른은 씁쓰레한 날이 바로 월급날이다. 현금자동지급기에 통장정리를 하면 주루룩~ 주룩룩~ 소낙비 내리듯 찍혀 나가는 각종 보험, 공과금과 학원비 등. 한참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통장 페이지를 자동으로 넘겨서 이체 결과를 통장에 입력해준다.

식구가 많아지면 수저 한 벌 더 얹으면 된다는 말은 옛말일까? 허튼말일까? 아이 세 명이 먹어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수저 한 벌이 아니라 곱절이 더 든다는 생각이 든다. 통장정리를 마치고 약간의 현금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는데, 엄마의 허무한 심정도 모르고 너무 맛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맛나게 먹는 모습에 희망을 보고, 용기를 얻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 아이들이 한 달간의 피로를 이렇게 풀어주는구나!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랴!

일정한 금액으로 계획을 세워 아이들과 외식할 여유를 부릴 수 있으니 언제나 적다고 생각했던 월급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며칠 전에도 아이들은 엄마의 월급날이 다가오자 이번 달에는 무엇을 먹을까? 저희들끼리 궁리를 하더니 고기는 비싸서 못 먹겠고, 채소는 별로고 하며 새로운 것을 먹고 싶어했다.

잠자코 눈치만 보고 있었더니 "이달에는 셀프다" 하며 큰딸이 외쳤다. 식당에서 만들어준 음식이 아닌 집에서 스스로 만들어 먹겠다며 재료값만 달라고 했다. 외식비의 반값도 안 되는 현금을 주며 알아서 해보라고 했더니 엄마, 아빠는 외출했다가 저녁에 돌아오라며 휴가까지 주는 것이다.

애들 말대로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와 보니 허무는 달아나고 기쁨만 집안 가득했다.

어느새 철이 든 고2, 중2 딸들, 그리고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엄마, 아빠의 월급날엔 고생했다며 저희들이 챙겨줘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어서 만들어 낸 '우리 가족표 웰빙피자'.

인터넷을 통해 비법을 알아냈다는 그 맛, 감동의 맛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남편은 어느새 세면장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이런 것이 자식 키우는 재민가 보다. 그래서인지 이번 달 월급을 두 배로 받은 기분이었다.

류승찬(대구 수성구 범어3동)

♥남편 마중 나가는 날

23년 전 결혼할 당시에 나는 직장을 다녔고 남편은 개인 사업을 했으나 1년도 안 돼 정리를 하고 맞벌이를 했다. 남편 월급날이면 으레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남편은 어김없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 마리 양념통닭과 음료수를 사왔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너무나 고마웠고 단 한 번도 '쥐꼬리만 한'이라는 생각조차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사업실패의 후유증으로 두 사람의 월급으로도 남는 것이 없는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몇 개의 봉투에 용도에 맞게 생활비를 나눠 담고 가계부는 늘 머리맡에 두고 일기장 겸 남편과의 대화의 장으로 서로 힘과 용기를 주는 글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그때는 애틋한 사랑과 희망이 있어 행복했다. 몇 년 후 함께 다시 가게를 시작해 15년 동안 노력과는 상관없이 고비 고비 참 많이 힘들었다. 어느덧 남들은 명퇴를 앞두고 창업 고민을 하고 있는 나이에 우리는 과감히 정리를 하고 더 늦기 전에 4대보험이 있는 곳에 취업을 하려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성실하고 알뜰한 우리는 오히려 월급쟁이 생활이 더 나았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도 하였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그 옛날 손꼽아 기다리던 월급날, 반 마리 통닭에 너무나 행복했던 월급날을 추억하며 주위에선 무모한 도전이라 염려하지만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우리는 또 다른 희망을 꿈꾸고 있다.

김진란(대구 북구 태전동)

※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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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원구(대구 수성구 상동)

다음 주 글감은 '만우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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