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여년 풍파 겪은 세계 最古 흙성…양쪽에 강물 흘러 '천혜 요새'
실크로드 탐사를 시작하여 시안(西安)에서 란저우(蘭州)까지 8시간의 기차여행을 끝내고 란저우부터 우웨이(無威), 장예(張掖), 지아유관(嘉峪關), 둔황(敦煌), 하미(哈密), 샨샨(鄯善), 투루판(吐魯番)까지, 하루 평균 700~800㎞,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를 매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이야 버스를 타고 하루에 많은 거리를 이동하지만 예전에는 도보와 낙타 등의 도움만을 받아 이동했을 테니, 그 힘듦과 고단함의 여정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호사스러운 여행객들인가.
고창고성과 베제클리크 석굴, 아스타나 고분군을 둘러본 후 투루판 서북쪽의 교하고성(交河故城)으로 향했다. 남북 1,650m로 나뭇잎 모양의 토성(土城)인데 글자 그대로 양쪽의 강물이 교차하여 천연 해자(垓子)가 된 천혜의 요새다. 동서쪽에는 주거지. 북쪽에는 불교사원과 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톈산산맥 북쪽에서 남하한 이란계 유목민 차사인(車師人)들이 3천 년 전에 세운 이후 고창국에 편입되어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 고성이다. 이 세계 최대 최고의 흙성은 건조한 사막 기후 덕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진흙의 건축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천 년의 풍파,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파괴 그리고 전란으로 온전한 데가 거의 없다. 최근에 조성된 듯한 벽돌이 깔린 탐방길 외에는 유물 보전을 위해서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벽과 건축물에 올라서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기도 해, 정도의 차이지만 그 훼손은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나무판자를 깔아 놓은 성의 외곽부에 다다른다. 거기에 200여 명 영아(嬰兒)의 공동묘지 비석이 서 있다. 13세기 몽골족이 성을 함락하자 철수하는 주민들이 훗날 아기들이 적국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여서 묻은 것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그리고 전염병 때문에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라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어떤 것이든 그 연유를 잘 알진 못하지만 안타까운 비운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간격이 채 2m도 되지 않는, 성인 2명이 한꺼번에 출입하면 끼일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성벽 사이 관서유지(官署遺址)란 팻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역시 땅을 파서 만든 건물이다. 제법 긴 계단을 내려가니 직사각형의 상당히 넓은 마당이 나온다. 사방 벽에는 터널형태의 방들이 뚫려 있다. 고대의 왕궁이며, 왕의 집무실, 왕의 침실, 관리들의 사무실, 신하들의 대기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이름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한 군인과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피 흘려 죽어가는 한 가장의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이 무너진 흙벽들에서 듣는다. 언제나 역사서에는 무명의 민초들보다 승리한 위정자의 이름만 전해오지 않는가. 이 모든 이들의 넋이 복되고 안녕하기를 기원하듯 북쪽 끝 편에는 현장법사가 다녀갔다는 대불사(大佛寺)가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안내판이 있어 겨우 알아볼 정도다.
투루판 시내 쪽으로 이동해 소공탑(蘇公塔)으로 갔다. 소공탑은 1777년 청나라 건륭제 때 투루판의 왕 소래만(蘇來滿)이 자신의 아버지 에민호자(額敏和卓)를 위해 건립한 이슬람식 탑이다. 에민호자는 청에 귀순하여 건륭제로부터 투루판의 자치권을 인정받는다. 44m의 탑을 모퉁이에 배치한 사각형의 사원은 15m 높이의 흙벽으로 둘러져 있다. 이 흙벽의 우듬지는 십자모양 틈으로, 원추형의 탑은 기와형의 작은 가로 벽돌쌓기로 조성했다. 또 탑신 전체를 격자무늬와 물결, 꽃 그리고 마름모꼴의 여러 문양을 섞은 형태로 쌓아올려 기하학적인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내부는 역시 외부와 마찬가지로 단청이나 채색이 없었다. 이슬람 율법인 신상(神像)과 그 어떤 종교적인 장식을 금하는 까닭이다. 다만 나무 기둥 사이엔 채광창이 뚫렸고 바닥엔 양탄자만 소박하게 깔려 있다. 탑 뒤쪽의 정원에는 이슬람식 무덤이 즐비했다. 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흙무더기에 반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의 윗부분을 한 전형적인 이슬람식 무덤이란다. 무덤의 윗부분과 높낮이는 생전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중심부의 가장 큰 돔형 무덤 위에 이슬람의 초승달 표식이 있다.
저녁식사 후 어김없이 투루판 시내 관광을 나섰다. 이 지역에 위구르족, 회족, 한족이 모여 살듯 택시 또한 여러 종류였다. 일반택시, 삼륜택시 그리고 당나귀가 끄는 마차도 있었다. 이슬람 도시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술도 팔고 있다. 날로 한족의 인구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 또한 무슬림과 한족의 융화가 가져온 영향인 듯하다. 야외무대에는 음악소리가 한창이다. 가까이 가보니 중년의 남녀들이 군무(群舞)를 추고 있다. 투루판의 밤은 그렇게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글:강민구 ㈜대한디지털 대표
사진: 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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