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지옥문이라도 열린 듯하다.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의 강진과 쓰나미가 할퀴고 간 처참한 모습과 핵 재앙 위기로 치닫는 원전 사태를 접하면서 할 말을 잊은 채 한숨만 내쉰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이며 인간이 쌓아올린 시스템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2년 전쯤 팔공산에 있는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지진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주방 같은 실내를 꾸며 놓고 방을 흔들어 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을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경험해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들 만큼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단지 시뮬레이션인데도 7.0은 전율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이 규모 9.0이다. 수치가 1 올라갈 때마다 에너지가 32배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7.0보다 1천 배가 넘는 가공할 에너지가 일본 동북 지방을 뒤흔든 셈이다.
일본인들의 유전자에는 세 가지 트라우마가 깊이 각인돼 있다. 화산, 지진, 그리고 핵. 그런데 일본인들은 지금 이 셋 가운데 두 가지가 동시에 주는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는 동물적 충동이 인간성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재난의 현장에서는 약탈과 방화, 혼돈이 흔한 모습이다. 그러나 대재앙의 한복판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아비규환이라 할 만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 구조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울부짖지도 않았다.
대재앙 속 일본인들에게서 참혹, 비탄, 절망이 아니라 침착, 배려, 질서를 발견한다. 재난 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개인과 전체의 이익이 상충되면 순종을 택했다.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 박힌 '메이와쿠 가케루나'(迷惑を 掛けるな) 즉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관념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일본 영화, 드라마, 뉴스 등에서 일본인들이 오열하거나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일본인들의 메이와쿠 가케루나 정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땅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화산, 지진, 쓰나미 등 요동치는 땅 여건 때문에 일본인들은 자연을 두려워했다. 내세의 구원보다 당장의 안전이 더 아쉬웠기에 동네마다 사당을 짓고 정령과 자연신에 기댔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우상숭배이며 심판을 받을 일로 비쳤나 보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한 종교 지도자가 "이번 지진은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젖은 일본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
메이와쿠 가케루나를 만든 데에는 봉건 문화도 일조를 했다. 영주를 모시는 사무라이들은 평민들에 대한 즉참(卽斬'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베어 죽임) 권한을 가졌다. 아무 데서나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사무라이의 칼을 맞을 우려가 크다 보니 일본인들은 습관적으로 말을 아꼈고 감정 노출을 꺼렸다.
장판이 기름종이라서 걸레질만으로 대소변 처리가 용이한 까닭에 아이의 배변에 비교적 관대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다다미 방에서는 아기의 대소변 청소가 예삿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엄격한 '뒤처리'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슬플 때는 울어야 가슴에 한이 덜 맺힌다. 힘들 때 서로 부여안고 실컷 울고 나면 재기의 의욕도 돋아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들은 오열하는 법을 잃었기에, 불행한 민족일 수 있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동안 속은 까맣게 타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뻘밭 위 집터에서 아기 먹일 분유가 모자라 미안해하며 울먹이는 엄마의 사연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자연 대재앙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이제는 핵 공포가 일본 전역을 드리우고 있다. 침착함을 유지하던 일본인들의 눈빛도 불안감에 흔들리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화산, 지진, 쓰나미 걱정 없는 한국 땅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를 자주 넘봤다. 그 때문에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은 좋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기억을 잠시 묻어두자. 인류애 차원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할 때다. 일본이 지진 대재앙과 원전 방사능 유출 사태를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기원한다.
김해용(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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