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내려온 후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안 어른들의 건강과 안부를 묻다가 요즘 어르신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인 치매 이야기로 자연스레 화제가 옮겨졌다. 이 친구의 치매에 대한 생각은 이랬다. "치매에 걸리는 게 두려운 것은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내가 기억을 못하더라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과 산다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 얼마나 따스한 말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과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이웃집 밥그릇 숫자까지 알 정도의 마을 문화와 농촌 문화가 자리 잡고 있던 시절. 하지만 전후 가난 극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산업화의 광풍은 이제 농촌 인구를 전체인구 대비 6% 남짓한 300만 명 정도로 줄어들게 했고 마을 문화는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도 그만큼 사라졌다. 이제 도시화가 90% 이상 진행된 국민소득 2만달러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실업문제다. 정부가 아무리 출산장려정책을 내놓아도 양육비에 대한 부담으로 출산율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발지상주의가 대세인 이 땅에서 과감히 비용을 들여 복지정책을 추진할 리는 만무하다. 광고에서 제발 애 좀 낳자고 떠들어도 결혼한 부부들은 콧방귀만 뀐다. '고작 돈 몇 푼 쥐여 주며 몇 억원씩 들어가는 애를 어떻게 키우라는 거야.'
이뿐만이 아니다. 마을 문화가 사라지면서 노인들은 역할이 없어지고 짐이 되어 버렸다. 출산을 장려하는 가장 큰 이유가 노인 부양 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제 다시 산업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양산한 이 문제가 돈으로 해결 가능한 것인가?'라는 부분이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복지제도가 발달한 유럽에서도 노인들은 외로워 보인다. 물론 복지정책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지금과 같은 정책은 궁극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을 문화의 창조적 복원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땅에 기반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땅에 기반한다는 것은 공통의 근거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여든이 넘으신 외할머니는 아직도 손수 농사를 지으시면서 아홉 자식에게 고구마며 들깨 따위를 보내신다. 너무 힘들지 않으시냐고 걱정하면 소일거리로 집 앞에서 조그맣게 하는 일이라 괜찮다고 하신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이런 풍경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도시의 조그만 공터라도 보이면 그곳엔 어김없이 손길이 닿아있다. 어디서 그렇게 준비했는지 작은 돌들이 경계를 만들고 푸성귀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 작은 공터들마저 자꾸만 사라져 간다. 도시에서 빈 땅은 비효율적인 공간이다. 대구올레 1코스인 금호강을 따라 걷는 길의 백미는 율하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하천변에 일구어진 텃밭들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돌들을 쌓아 삐뚤빼뚤 경계 지어진 밭들을 보며 감동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에 따라 금호강에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들이 오랜 시간 농사지어온 땅은 빼앗겼다. 금호강 가에 작은 텃밭을 일구던 이들을 무단점유라는 이름으로 쫓아낸 후 그들이 한 일은 나무를 베어내고 시멘트를 발라 강과 사람이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노인정 하나 짓고 복지관 하나 짓는 것보다 어쩌면 이런 공터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어 그곳에서 경작하게 하는 일이 더 소중한 일일는지 모른다. 도심 곳곳에 어르신들을 위한 공동 농장이 마련된다면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될 수 있다. 노인들이 토마토며 고추가 이렇게 자라서 너희가 먹는다고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울 어느 자치구에선 학교급식 재료를 동네 어른들이 생산해서 공급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일본의 지진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피해 복구로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이미 국가 부채가 1년 예산의 두 배가 넘는 일본이 복구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보다 공사를 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부분들을 경제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대가로 돈이 돌고 지구촌 반대편에선 굶주림이 늘어난다. 이 엉터리 경제논리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농사 짓는 땅을 늘리면 당장의 경제에는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나를 기억해 주는 이웃들이 있는 마을을 이 도시에 만드는 일. 그것은 땅의 경제학, 순환의 경제학, 나눔의 경제학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그래야 지역이 제대로 살아난다.
안재홍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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