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사랑 메모

입력 2011-03-15 07:05:01

새로운 만남과 이별의 기억으로 수없이 덧칠된 내 마음의 캔버스는 봄이 오면 더 아련해진다. 세상을 지탱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그어대는 포물선을 따라 생성과 소멸의 경로를 빈틈없이 거쳐 가는 게 자연의 섭리다. 온갖 인연으로 얽힌 관계를 키워갈수록 이별 또한 정해진 순리가 아닐까.

그런 인식론은 타인의 이별을 바라볼 때만 성채처럼 견고한 이성이 작용할 뿐, 여전히 소유에 대한 집착과 현상의 유혹에 결박당한 경우에는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모래먼지일 따름이다. 이별은 필연적이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관계들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사무치는 기억조차도 잊힌다는 사실은 뿌리치기 어려운 슬픔이다.

나는 늘 내일이어도 괜찮을 거라는 안일한 마음 때문에 정말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 전할 기회를 자주 놓치며 살았다. 그것을 한탄하고 후회하면서도 습관처럼 과오를 반복해 왔다. 약주 한잔에 마음이 넘친 아버지가 못난 아들 등에 업혀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부르시던 날,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친구가 먼 길을 떠났을 때도 내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내일 혹은 그 다음날이면 다시 만나서 비 갠 하늘처럼 개운하게 웃음을 나누리라 다짐했던 이들과 급작스런 이별을 한 기억이 많다. 그 헤어짐의 문턱에 서서 한번만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후회 때문에 더 서러워했다. 어디 사람뿐이랴.

창가에 아껴둔 작은 풀꽃 화분이 밤새 몰아친 폭풍우에 사라졌을 때, 주머니 속에서 낡아가던 손수건을 잃었을 때도 가슴이 시렸다. 마지막 이삿짐을 들어내며 작업실의 녹슨 키를 돌릴 때, 빛바랜 사진이나 그림을 태우던 날에도 이별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서랍정리를 하다 발견한 끝내 부치지 못한 첫사랑의 편지다발을 꺼내 들 때, 예술과 자아를 찾아 방황하던 날들을 목탄 빛깔로 기록한 먼지 낀 일기장을 들춰볼 때조차도 그랬다. 가슴 밑바닥에 고이는 마지막 앙금은 그 삶의 순간순간마다 인색했던 말 한마디가 후려치는 둔탁한 아픔이었다.

이제 곧 화사한 봄이 밀물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 또한 영원할 것처럼 장엄한 꽃 잔치를 온 산천에 펼쳐 놓다가 홀연히 이별의 노래를 따라 가리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이별은 그래도 애잔하고 아름답지만 영영 기약 없는 소멸은 영혼까지 상처를 줄 정도로 아픈 법이다. 이별을 슬퍼하지 않으려면 온 몸으로 사랑할 수밖에…. 이번 봄 만큼은 나와 너에게, 우리와 세상 모든 것들에게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며 맞이해야겠다.

이영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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