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이 능사 아니다 생각 나누고 정리하라
이젠 '책 읽지 말고 공부해라'라는 잔소리도 옛 얘기다. 입시 제도가 급변하면서 책 읽기가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서 수험생의 '독서 이력(履歷)'은 주요 평가 지표로 떠올랐다. 독서 이력은 학생이 어디에 관심을 갖고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알 수 있는 발자취. 진로에 대한 준비와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됐다.
자연히 학부모들의 고민도 늘어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걸까. 무작정 많이 읽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자녀의 수준과 적성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책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무턱대고 '공부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조언한다. 독서 습관이 배어 있지 않은 학생이 책을 억지로 읽어야 하는 스트레스는 일반 교과목 공부 때와 다를 바 없다.
◆독서 열기에 달라진 변화들
"독서 이력이 입시에 반영이 된다는데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으니 한숨만 나오죠."
이정임(41'여'대구시 달서구) 씨는 초교 5년생 아들이 독서를 싫어해 걱정이 크다. 독서 이력이 진학에 필수라는데 어떤 책부터 권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아들은 보습 학원에 가지 않을 때 컴퓨터만 만지작거리기 일쑤다. "맞벌이 부부여서 아이에게 신경을 제대로 못 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독서 이력 관리는 고사하고 책을 읽으라고 하면 지루하다며 투덜대니 난감하죠."
중 1년생 학부모 김선애(45'여'대구시 수성구) 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이 들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TV를 멀리한 채 아이와 함께 책을 읽었다. 김 씨의 남편도 거들었다. 책은 아니어도 신문을 들고 아이 옆에 앉은 것. 덕분에 아이는 책을 즐겨 읽게 됐다. 하지만 김 씨는 최근 들어 아이가 독서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필독서라며 이것저것 자꾸 권했더니 아이가 점차 질리는 것 같아요. 남에게 보여주려고 억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나 봐요. 독서가 곧 입시 준비라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은 걸까요?"
독서 열풍 속에 학부모들의 불안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학원가에는 독서 이력 관리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서점은 책을 고르는 학생과 학부모의 발길이 이어지는 등 관련 업계도 술렁이고 있다.
바뀌는 입시 제도에 발빠르게 대응해온 학원가는 이미 새 시장에 발을 디뎠다. 독서 열풍이 불면서 독서 이력을 관리해 준다는 학원 프로그램도 속속 등장, 입시 제도 변화에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다.
논술학원은 시험에 나올 만한 책을 가려 읽힌 뒤 강사의 질문에 답하게 하고 소감문 작성까지 확인하는 등 독서 이력을 하나하나 챙기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종합반을 운영하는 학원들도 가세 중이다. 한 학원 강사는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하는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 같은 프로그램 개설은 필수가 됐다"며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책은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제공하고 입학사정관이 물을 법한 내용도 챙겨준다"고 했다.
신학기를 맞은 서점가에도 학생 손님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있다.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들러 책을 읽거나 사가는 부모들, 교복을 입고 책을 고르는 학생들이 쉽게 눈에 띈다. 입시에서 독서가 부각되면서 인문 교양 도서 코너에서 책을 집어드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지역 한 대형서점 관계자는 "화제를 몰고 온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센델 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장하준 저) 등은 읽기에 다소 어려울 텐데도 학생들이 자주 찾는다"고 전했다.
◆독서,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까
"학부모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에 집착하고 학생은 학습만화에 빠져 있거나 특정 분야의 책만 골라 읽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독서 교육 전문가들이 말하는 '독서 활동에 있어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다. 그만큼 독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입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학생과 학부모 모두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에서의 독서 교육만으로는 입시 대비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쟁력 있는 독서 이력을 갖추려면 초교 고학년부터 입시 전략에 맞춰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며 학부모들을 불러모은다. 독서 이력 관리는 일찍 시작해야 보다 많은 것을,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으므로 아무래도 소수 학생을 지도하는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
한 독서논술학원 강사는 "학원가에서는 수강생 확보를 위해서라도 학생 하나하나를 붙잡고 독서 이력을 꼼꼼히 챙기기 마련"이라며 "학생들이 독서에 투자할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최근 베스트셀러를 살핀 뒤 진학을 희망하는 학과와 관련된 책을 골라 읽는 요령 등을 자세히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독서 교육에 애써온 교사들은 사교육에 투자하는 대신 공공'학교 도서관 활용과 독서토론 동아리 활동 등으로 취미로서의 독서뿐 아니라 입시 대비까지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유천초교 윤판자(58'여) 교사는 "초등학생은 조금씩이라도 학부모가 책을 직접 읽어주는 것이 흥미를 유도하기에 가장 좋다"며 "권장도서 목록을 찾아 읽을 책을 고르는 것부터 자녀와 함께 하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그가 추천하는 목록은 인터넷 사이트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책따세'readread.or.kr)이나 공공'학교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동부도서관(dongbu-lib.daegu.kr)이 책 246편을 선정해 서평과 함께 담은 '추천도서 맛보기' 제8집이 대표적인 것.
매곡초교 김견숙(30'여) 교사는 "입시를 염두에 둔 책 읽기는 중학교 이후에 하도록 하고 초등학생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 좋다"며 "아이들은 '이것은 내 것'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책을 직접 사보게 하고 작은 공간이라도 자녀만의 서재를 만들어주는 것도 독서 의욕을 북돋우는 방법"이라고 했다.
달성정보고 김민자(52'여) 교사는 중'고교생들에게 독서토론동아리 활동을 권했다. 그는 "책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래 집단과 읽은 부분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정리해보는 것이 독서 이력 기록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학부모들도 서두르지 말고 독서 습관이 자녀 몸에 배도록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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