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기술진이 오랫동안 탐사한 후 3개 공을 시추한 결과, 그 가운데 한 군데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성이 있을 만큼의 매장량이 있는지는 더 조사해 봐야 합니다."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 때 밝힌 이야기의 요지다. 그러자 거의 모든 신문이 '포항 석유 발견'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대통령이 '석유가 발견되었다'고만 했는데, 언론에서는 '유전이 발견된' 것처럼 과장해서 보도한 것이다.
1975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중화학공업담당 수석비서관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는 링거 병을 보여주더니, 마개를 뽑고 액체를 큼직한 재떨이에 조금 부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재떨이에 번졌다. 시커먼 연기도 났다.
오 수석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유에는 가스 성분'휘발유 성분'경유와 중유 성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그래서 불을 붙이면 가스 성분이 '펑' 하고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는다. 그런데 그 기름은 정제된 기름처럼 얌전하게 불탔던 것이다. 오 수석은 직감적으로 원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 수석은 그 기름을 분석해 보겠다며 링거 병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김광모 비서관에게 보였고, 두 사람은 '또 누군가가 엉터리 보고를 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정보부가 포항에서 시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동안 석유가 나왔다는 보고가 허위로 밝혀지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호남정유의 임원이자 우수한 화학기사인 한성갑을 불렀다. 기름이 든 유리병을 넘겨주면서, "가장 빠른 편으로 미국 칼텍스에 보내 시험을 하되, 원유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 달라"고 했다. 한 4일쯤 지났을까, 한성갑이 분석보고서를 들고 들어와 "원유가 아니라 경유"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험한 그래프를 펴놓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오 수석은 지질연구소 소장에게 전화로 "포항에서 기름을 파고 있다면서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장은 마지못한 듯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시추할 때 윤활 목적으로 경유를 사용하는 게 아닙니까" 하고 다시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오 수석은 경유를 원유라고 오해한 까닭을 이렇게 추리해 보았다. '새로 시추하기 시작한 시추공의 위치는 공동(空洞)이 있는 지상이었다. 경유와 윤활유 등은 공동 안의 물 위에 떠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시추 과정에서 표면으로 올라오게 되어 있다. 이것을 가지고 현장 사람들이 원유가 나왔다고 잘못 안 것이다.' 그때가 1975년 12월 3일 새벽이었다.
오 수석은 보고서를 가지고 김정렴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은 여러 사람들에게 원유가 나왔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만일 원유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하지만 사실대로 보고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잠시 뒤 두 사람은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 수석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당장 중앙정보부장을 불러!"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날처럼 화를 내던 모습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런 가운데 신직수 정보부장이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오 수석에게 "임자 생각은 어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각하, 정보부에서 보고한 대로 시추 작업과정에서 채취된 기름이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라서 원유로 잘못 안 것 같습니다" 하고 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 부장, 포항에 석유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고 말썽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속 시원히 뚫어서 확인하도록 하시오." 그제야 오 수석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1975년 12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열차를 탔다.
석유에 한이 맺힌 대통령은 원유가 담긴 병을 자신의 집무실에 둔 이후부터 틈만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열린 만찬장에서도 포항의 석유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포항 석유의 꿈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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