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봄날은 온다-네 멋대로 그려라

입력 2011-03-08 07:57:57

수륜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구 반고개에서 성서를 지나 성주읍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길이고 하나는 서부정류장에서 고령을 거쳐 바로 수륜 작업실에 가는 길입니다. 88고속도로를 타고 고령을 거쳐 가는 길은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시원한 들판을 바라다보며 가기 때문에 속이 시원합니다. 성주로 가는 길은 완연한 봄이 오면 볼거리가 많아서 눈요깃감이 많지요.

오늘은 시외버스를 타고 너른 들판을 보며 수륜 작업실로 갑니다. 왜 가냐고 물으신다면 우문우답 아닐까요? 집과 작업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수도 파이프가 얼어터져 고치러 갑니다. '기술자도 아닌 내가 기초적인 상식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간단한 공구와 재료를 들고서 집으로 갑니다.

지난겨울은 워낙 추위가 혹독해서 실내의 수도꼭지도 얼었습니다. 20여 년간 살다가 처음 있는 일이라 황당했지요. 집을 자주 비운 탓도 있겠지만, 실외의 수도는 어떻겠는가? 어느 날 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새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일단 작업실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수도관을 반으로 잘라서 밸브를 막아, 집안에는 물이 새지 않게끔 해두었습니다.

그리고는 퍼뜩 드로잉 서너 장을 그립니다. 괴발개발 말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손을 푼다거나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워 그냥 냅다 질러보는 그림들입니다. 집 주위를 살펴봅니다. 매화 봉오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몇개가 탁 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초 이파리가 돋아나고 있네요. 꽃보다 잎이 먼저 나고 잎이 지면 꽃대가 올라오는 신기한 식물입니다. 상사초라고도 하는데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꽃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심은 배추포기에서 푸른 잎이 나옵니다. 쫑대가 올라오고 노란꽃이 피면 벌들이 날아올 것입니다.

봄바람이 싱그럽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시 대구로 와서 남문시장에서 잔치국수를 한 그릇 먹고, KTX 타고 서울로 갑니다. 뭐 그렇게 바쁘냐고 또 물으신다면 "아이가 서울로 가기 때문에 살림살이 일부분을 공수하러 간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미술 전공을 하겠다고 그림을 그리다가 고3이 되어서 실용음악을 전공한다고 컴퓨터를 뚝딱거리더니 작곡을 하겠다고 합니다. 작년 봄에 수시합격을 하고 재즈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30여 년을 대구에서 머물며 그럭저럭 활동하는 저에 비하면 아이는 한방에 자기 뜻을 서울에서 펼치겠다고 합니다. 아비된 마음으로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서울생활에 잘 적응할 것인지 걱정도 됩니다.

바야흐로 3월이라, 저의 생활도 이때부터 바빠집니다. 지난겨울 동안은 몸도 마음도 움츠려 마음껏 예술도 못하고 빨리 봄이 왔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어김없이 봄이 온 것입니다. 지인들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옵니다. "날씨 풀리면 한잔 합시다." 약속 잡아 얼굴 보고 헛소리하며 술기운에 노래 한곡 뽑자고 말입니다.

봄이 오면 텃밭 가꾸기가 우선입니다. 봄기운에 땅이 풀리면 다양한 씨앗들을 아낌없이 뿌립니다. 저의 태평농법은 채소 씨앗을 많이 뿌려 잡초가 자랄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잡초가 나더라도 채소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여 살아남도록 합니다. 채소 모종들이 나올 무렵이면 고추 모종부터 시작하여 피망, 오이, 가지, 호박, 파프리카 등을 심고 잘 자라는 열무씨도 뿌리고 엇가리 배추도 심어보고 상추도 물론 쑥갓씨도 뿌립니다.

지지대 세우고 거름을 뿌리고 물을 주고 야단법석을 떨고 막걸리 한 통을 먹은 후 한숨 돌립니다. 따뜻한 봄이 오면, 머위잎이 고개를 내밉니다. 적당히 컸을 때 된장에 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고, 쌈을 싸서 먹으면 쌉싸래한 맛이 잃어버렸던 입맛을 돌아오게 합니다. 두릅나무 싹은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상큼한 맛이 입안에 돕니다. 봄에 나는 나물들은 약초와 같아서 몸의 원기를 북돋워 주지요.

그리고 그림 농사도 지어야 되지요. 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그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술은 보편성이 아니라 텃세'라는 백남준 선생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작업으로 먹고살고 미술사에 남고 싶다고 했습니다. 참 소박하고 진솔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세계적인 대가가 되신 분이 말입니다. 젊은 작가들이여! 이 시대는 그대들의 것입니다. 봄날은 옵니다. 그대들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 멋대로 그려서 세계로 나아가기를 빕니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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