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라도 더…" 진학지도 자료 찾아 서울 유명학원 문턱 닳도록 다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잣대로 흔히 사용되는 것이 서울대 입학생 수다. 명문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서울대 입학생 수는 명문 고교가 충족시켜야 할 하나의 잣대일 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대학입시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서울대 입학생 수는 무시할 수 없는 평가 기준이 되고 있다.
덕원고는 2011학년도 서울대 입학 전형에서 10명을 합격시켰다. 대구지역 고교 가운데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덕원고가 짧은 기간 명문 사립고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이성한(62) 교장의 공이 컸다. 물론 이 교장 혼자 힘으로 명문고를 일군 것은 아니다. 교직원뿐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재단이 함께 노력한 결과다. 그렇지만 지도자의 역량과 열정이 어느 요소보다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30년 동안 덕원고와 동고동락한 이 교장이 이달 말 정년퇴임을 한다. 그를 만나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만족스럽지만 아쉬움도 남아"
이 교장의 표정은 밝았다. 퇴임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여전히 활기차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건강하게 정년을 채우고 떠나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울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죠. 하지만 30년간 정든 교정을 떠나려니 마음 한구석이 착잡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동료 교사들뿐 아니라 지금까지 저를 도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교직 생활을 돌아보면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럽다고 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산 것이 보람이라는 것.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첫 부임지였던 포항중학교에서 담임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제 공부를 위해 떠나야 했던 일이 아직까지 마음에 걸립니다." 1976년 경북대 사범대(지구과학교육학과)를 졸업한 이 교장이 첫 교편을 잡은 곳은 포항중학교였다. 당시 경북대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사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그는 부임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학교를 떠나야 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자들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평생 그를 따라다닌 것 같았다. 포항중학교 제자에게 진 마음의 빚은 이후 '사랑 없는 교육자는 생명이 없고, 희생 없는 교육자는 직업인에 불과하다'는 교육 철학을 가슴에 품고 더 열정적으로 교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방학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는 기회이다. 당연히 해외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많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진학지도를 하느라 방학 때도 거의 매일 출근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참고 이해해 준 아내가 참 고맙습니다. 고마움의 표시로 퇴임 후에는 꼭 한번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진학지도의 살아있는 전설
교장실에 들어서면 수많은 감사패와 표창장이 눈에 띈다. 퇴임을 앞두고 짐을 옮기고 있어 일부만 남았지만 한쪽 벽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다. 교육계 발전에 이바지한 이 교장의 공로를 짐작하게 만든다. 그는 대구지역 진학지도의 새 역사를 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교장은 1981년 덕원고와 인연을 맺었다. "경북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뒤 계명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2년 6개월 동안 학교 행정에 대해 더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교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마침 덕원고에서 교사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이 교장이 부임할 당시 덕원고는 개교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설 고교였다. 학교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 중일 정도였다. 그는 부임 이듬해 3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 이듬해는 3학년 부장, 한 해를 더 넘긴 뒤에는 연구부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1996년 교감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연구부장을 장기집권(?)했다. 교감으로 승진한 지 3년 만인 1999년에는 교장이 됐다. 연구부장~교감~교장이 되는 과정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됐다. 그만큼 그가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이 교장은 3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진학지도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는 체계적인 진학지도 자료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방학도 반납한 채 서울의 유명 입시학원을 수시로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했다. "당시에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교감으로 승진되었을 때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연구부장으로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진학지도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이 교장이 만든 자료는 이후 지역 고교생들의 진학지도에 널리 활용됐다. 그는 대구교육계에서 진학지도의 초석을 다진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교과 및 입시지도에서 보인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4회 대구교육상'을 받았다.
◆명문고 육성 밑거름이 되다
'무한불성'(無汗不成·땀이 없으면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이 교장이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터득한 철학이다. 그는 청춘을 바친 덕원고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대구의 몇몇 사립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내 발로 들어온 학교 내 발로 걸어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의 열정과 애착은 덕원고를 명문고로 육성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오늘날 덕원고가 있기까지 제가 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라며 공을 돌렸다. 하지만 지역 교육계에서는 이 교장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있다.
교장에 부임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력신장을 위해 교과협의회를 구성해 1학년 성적관리표를 만든 것이었다. 교과협의회와 1학년 성적관리표는 대구시교육청을 통해 다른 학교에 보급되면서 '히트상품'이 됐다. "시간표를 보면 특정 요일에는 특정 과목의 수업이 없습니다. 월요일에는 국어, 화요일에는 수학 수업이 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 담당 과목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과협의회를 갖습니다. 교과협의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수업시간에 반영됩니다."
1학년 성적관리표는 3년 동안 학업 관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1학년 성적관리표를 보면 입학 성적, 중간고사 성적, 기말고사 성적이 꼼꼼히 기록돼 있다. 한눈에 어느 학생의 성적이 올랐고 내렸는지 파악할 수 있다. 윗사람이 일을 너무 많이 벌이면 아랫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는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교장은 술자리 안줏거리로 꾸준히 회자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 교장이 학력신장만을 교육의 최우선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인성교육도 중시했다. "대한민국 교육의 특성상 학력신장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족한 인성교육을 보충하기 위해 모든 수업시간에 5분 동안 인성교육을 하도록 했습니다. 매년 인성교육 자료집도 발간해 교사들이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성적이 교육의 전부가 아닙니다.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학력신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2002년 덕원고는 황금동 시대를 마감하고 욱수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전한 뒤 학력 수준이 전체적으로 하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덕원고는 1986년 서울대에 37명을 진학시켜 대구경북지역 고교에서 1위를 차지했다. 서울대 정원이 줄고 전형 방법도 다양해져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서울대 입학생 수가 10명 정도로 줄었다. 이 교장의 입장에서 보면 성이 차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학교 이전에 만족하고 있다. "학력적인 성과는 예전만 못하지만 인성적인 면에서는 잘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좋은 시설에서 공부를 하며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구시교육감의 핵심 브레인
이 교장은 지난해 우동기 대구시교육감의 교육정책을 구체화하는 정책기획단장에 발탁됐다. 우 교육감이 정책기획단장을 물색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은 결과, 가장 적합한 인물로 이 교장이 거론됐기 때문이다. 정책기획단장을 맡으면서 그는 현직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도 정책 로드맵을 만드는 데 소비했다.
이 교장이 정책기획단장을 맡으면서 이슈가 된 것이 남녀공학 고교의 단성(單性)고 복귀 여부다. 그는 덕원고의 단성고 복귀를 추진했고, 우 교육감도 단성고 복귀를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교장은 학력과 생활지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했을 때 남녀공학보다 단성고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녀공학을 단성고로 돌리는 일에는 걸림돌이 많다. 이에 대해 그는 "객관적인 기관에 용역을 의뢰해 남녀공학이 바람직한지, 단성고가 바람직한지 평가 결과를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용역 결과 남녀공학이 좋다면 그대로 유지하고 단성고가 좋다면 과감하게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구 고교생의 학력 저하 현상에 대해 학교와 교육청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교에서는 우수 학생과 학업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 맞춤형 지도를 하고, 교육청은 개별 학교의 이런 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퇴임 후 계획
이 교장은 최근 아코디언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을 어느 정도 익히면 색소폰도 배울 계획이다. 몇달 전부터는 대구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원만한 해결을 유도하는 중재자 역할이다. 그가 음악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황혼의 로맨스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학교를 떠나 사회에서 봉사할 때입니다. 복지관 등을 찾아 음악으로 소외된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람들에게 원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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