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주부들부터 자존심 찾아가면 사회가 바뀌겠죠"…이영희 집행위원장

입력 2011-02-19 07:46:51

이영희 집행위원장
이영희 집행위원장

"전업주부의 3분의 1이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이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우리 시대 전업주부는 남편 이름으로 된 집에서 남편의 성을 가진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남편의 체크카드로 살아간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진 지 오래.

가장 뜨거운 30대를 여성 운동의 한복판에서 살아온 이영희(44) 씨는 시민운동의 옷을 벗고 풀뿌리공동체 '수성주민광장'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청춘을 바치며 싸웠다. 법과 제도가 바뀌면 여성 삶의 질도 당연히 높아지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여성의 삶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오히려 성매매는 음성화되고 가정폭력은 더욱 교묘해졌다.

쉼 없이 달려왔던 이 씨는 '이렇게 싸웠는데도 여성의 현실은 그대로'라는 반성을 했다. 오랜 성찰 끝에 '우리 동네부터 바꿔보자'는 답을 내렸다. 그래서 2007년 11월 비영리 민간단체 '수성주민광장' 창립총회를 가졌고 현재 회원 수는 170여 명에 이른다.

"내가 만나지 못했던 동네 아줌마를 먼저 만나보자 싶었어요. 한 개인이 바뀌고 그 개인이 모이면 사회가 되잖아요."

'대구의 대치동'이라 불릴 만큼 교육열이 높은 수성구이지만 여성들의 현실은 별반 다름없었다. 수성주민광장 회비를 이야기하면 '회비를 내면 쿠폰을 주나요'하는 질문이 돌아왔다. 이 위원장은 "사실 중산층의 전업주부는 자신의 학력, 재산 유무와는 별개로 공익 활동이나 시민단체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없다"면서 생활력이 강한 저소득층 여성과 비교했다. 그는 중산층 전업주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소모임들을 만들었다. 모임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여성들을 볼 때면 보람을 느낀다.

"처음엔 애들 교육 때문에 모임에 가입했다가, 점차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기 시작하죠. 그러다가 상담심리를 공부해서 미술치료사가 되기도 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합니다. 어릴 때 어렴풋이 꾸었던 꿈을 이루는 사람도 많아요."

이곳에서 여성들은 '자존감'을 찾는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얻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회원들에게 '자식 얘기 하지 말고 본인 이야기를 하라'고 못박는다. 아줌마들은 누구누구의 엄마에서 비로소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 약한 인적 네트워크도 만들어낸다.

오랫동안 여성운동 현장에 있었던 만큼 힘을 빼고 회원들과 보폭을 맞추는 게 이 위원장의 가장 큰 숙제다. 효율성을 앞세우다 보면 자칫 혼자 앞서나가기 십상이다.

"이 활동은 눈 앞에서 문제가 바로 해결될 수는 없어요.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죠. 보폭은 느리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최세정기자

사진'김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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