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 택시가 대구 중구 종각네거리에서 경북대병원으로 진행중이었다. 새벽시간. 신호등은 점멸로 운영되고 있었고, 택시는 일시정지했다 지나가야 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여대생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한동안 의식불명 상태를 헤매던 여대생은 사고 일주일여 만에 겨우 의식은 회복했지만 아직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경찰이 택시에 녹화된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한 결과, 당시 택시의 속도는 시속 90㎞로 나타났다. 만약 블랙박스 녹화 영상이 없었더라면, 피해자의 횡단보도 준수 여부, 과속 여부 등이 논란이 될 뻔했지만 블랙박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3의 목격자, 블랙박스
차량용 블랙박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차 내부에 설치해 주행상황을 항상 촬영해 저장해 두는 '제3의 목격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차량용 블랙박스는 차의 전방'후방'측면 상황을 자동녹화해 저장하고 차량 속도, 주행거리, 브레이크 작동 여부 같은 운행 데이터를 기록하는 장치다.
차량에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운전자들이 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도 상대방과 입씨름을 벌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칫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억울한 상황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시내버스 운전기사 A씨는 큰 곤욕을 치를 뻔했다. 교차로에서 오토바이와 충돌해 오토바이 운전자가 크게 다쳤는데, 오토바이 운전자 측은 "신호를 준수했는데 버스가 와서 들이받은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버스에는 CCTV가 설치돼 운전기사와 실내, 전방, 뒷문 등 4곳을 녹화하고 있었지만, 사고가 난 앞바퀴 쪽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 하지만 결국 A씨가 신호위반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맞은편에서 직진해 오던 택시에 잡힌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입증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신고했던 택시에 찍힌 화면에는 버스가 진행중인 방향이 양방향 초록색 직진신호 상황인 것이 고스란히 찍혀 있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접촉사고에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할 정도로 우기기가 심한 것이 우리나라 교통문화의 현실. 이 때문에 여성운전자들에게는 블랙박스가 필수품처럼 인식되고 있다. 상대 차량 운전자가 남성일 경우 여성 운전자들을 만만하게 보고 우격다짐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안모(32'여) 씨는 "얼마 전 구청에 업무를 보러 갔다가 검은색 다이너스티 운전자가 내 차를 긁었는데 오히려 '왜 여자가 운전을 이 따위로 하냐'고 큰소리를 치더라"며 "그날은 옆에 주차하고 있던 트럭 운전자가 증언을 해주겠다며 편을 들어줘 겨우 넘어갔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블랙박스를 설치했다"고 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데도 블랙박스가 요긴하게 쓰인다. 최모(53'여) 씨는 "얼마 전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 식당에 주차를 해 뒀는데 누가 차를 긁고 달아났다"며 "하지만 블랙박스를 설치한 덕분에 앞에 주차된 차량이 후진하면서 내 차를 긁고 도망간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결국 수리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사고 감소에도 일등공신
관련 업계는 블랙박스를 설치한 차량이 전국적으로 30만 대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직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 1천765만 대의 1.7% 정도로 적은 숫자이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팔린 차량용 블랙박스는 13만 대로 2009년 5만 대보다 2배 이상 늘었다.
대구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시내버스와 택시에 영상기록장치가 부착됐다. 대구시내버스운송사업조합은 사업비 17억원을 들여 2009년 초 1천658대에 이르는 모든 시내버스에 CCTV를 설치했고, 택시는 지난해 상반기 8천800여 대에 블랙박스를 설치한 뒤 올 상반기 추가로 8천여 대의 택시에도 이를 부착할 계획이다.
운수업계가 블랙박스 설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교통사고 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고 예방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구법인택시공제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택시 교통사고는 2천820건(사상자 4천468명)으로 2009년에 비해 사고율이 1.4%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박근 법인택시공제조합 부지부장은 "고작 1.4% 감소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교통사고 1% 줄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며 "더구나 사고율 감소보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사망자와 중상자가 크게 줄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블랙박스가 장착된 뒤 지난해 대구에서 발생한 법인택시 관련 사망사고는 2009년 26명에서 2010년 14명으로 12명 줄었으며, 중상자(상해등급 14등급 중 1~7등급) 수도 2009년 239명에서 2010년 194명으로 55명 감소했다.
그는 "블랙박스를 장착함으로써 가'피해자 간에 사고 판단이 명확해지고, 운전기사들이 블랙박스에 주행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 아무래도 조심 운전을 하기 때문에 사고가 줄어든 것 같다"고 밝혔다.
교통사고의 감소는 경찰서 교통사고조사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대구 중부경찰서 장두천 주임은 "택시의 경우에는 주행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예전에는 교통사고조사계에서 처리하는 사고 10건 중 5건은 택시가 관련된 사고였을 정도로 사고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2, 3건 정도로 크게 줄었다"며 "더구나 블랙박스에 사고 상황이 영상으로 기록돼 있고, 별도의 프로그램을 통해 속도와 충격 그래프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사고 경위와,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는 데 드는 수사력도 절감되고 있다"고 했다.
◆자동차보험 할인 혜택도
블랙박스가 인기를 얻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보험사가 블랙박스 설치 차량에 대해서는 보험료를 할인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사들은 2009년부터 자동차보험에 '블랙박스 할인 특약'을 두고 있다. 블랙박스를 설치하면 사고를 사정(査定)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기 때문에 보험사 입장에서는 각종 인건비와 시간 등을 크게 절약할 수 있는 것.
2009년부터 더케이손해보험, 삼성화재, 동부화재, 흥국화재, 메리츠화재, AXA손해보험, 하이카다이렉트, 에르고다음다이렉트 등에서 블랙박스 할인 특약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지난해 LIG손해보험과 한화손해보험도 할인 대열에 합류했다.
이 제도는 최대 3%(보험감독업법 지정사항)를 할인해주기 때문에 연간 70만원의 자동차보험료를 납부하는 운전자라면 보험료를 2만원 정도 할인받을 수 있다. 신규가입할 때나 보험을 갱신할 때 해당 보험사에 블랙박스 단말기 번호(시리얼 넘버)를 알려주고 확인을 받으면 할인받을 수 있다. 일부 보험사는 블랙박스의 GPS 유무에 따라 가입 가능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에 블랙박스 단말기의 기능을 꼼꼼히 확인해 둬야 한다.
보험사 관계자는 "영업용 차량 등은 차량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라도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자가 운전자들도 최근 블랙박스 단말기 가격이 떨어지면서 설치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며 "자동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 과실 여부를 가릴 수 있는 확실한 증거로 블랙박스 영상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점점 관련 특약 가입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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