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내 고향은…

입력 2011-02-18 08:00:49

시카고 어학연수 온 어린 친구, "대구에서 왔는데요"라는 말에 '울

♥ 위로 받으러 고향 꽃구경

어린 시절 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단 조용히 뒷산이나 하늘, 바람, 마당, 새싹, 나무, 꽃, 장독 등을 유심히 살펴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하루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새싹에 나도 모르게 '어머나' 하며 박수를 짝짝 치며 신이 나기도 하고, 눈을 감고 따스한 봄바람을 볼에 느끼며 간지러워 살며시 웃음 짓기도 했다. 파란 하늘 뭉게구름 속으로 나도 쏙 들어가 구름을 따라다니며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난데없이 울어대는 이웃집 장닭의 '꼬꼬댁' 소리에 놀라 상상의 나래를 접곤 했다.

특히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는 봄이 되면 난 파티장의 공주처럼 꽃구경에 마냥 행복해 했다. 온통 분홍빛의 복숭아꽃, 살구꽃으로 뒤덮인 담 너머로 보이는 고향동네는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 같았다. 초등학생인 나는 혹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눈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신선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곤 이내 아버지를 졸라 어설프게 만든, 서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받침대와 중학생 오빠의 수채화 물감을 가져와 그림 그릴 준비를 하였다. 사진기가 없으니 이 아름다운 광경을 그림을 그려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빨래집게 두 개로 얇은 나무판자와 스케치북을 집어 고정시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꽃으로 둘러싸인 동네를 예쁘게 담아 보려고 애를 썼다.

그 그림 속 고향마을 초등학교에는 세종대왕동상이 있고 무궁화 꽃에 둘러싸인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시던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셨다. 또한 자식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을 존중하며 예의를 갖춰 대하는 부모님들이 계셨다. 이런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존경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 아이들 중에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열심히 공부하여 효도하겠다며 의지를 굳게 다지던 조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자라 그 시절 우리 부모님 나이만큼 되어 늘 고향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난 지금도 종종 위로나 격려를 받고 싶거나 의지가 약해지면 복숭아꽃, 살구꽃이 핀 정다운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고향마을로 꽃구경을 간다.

김순희(대구 북구 구암동)

♥낯익은 지명 들으며 옛생각에…

섭씨가 아닌 화씨로 매일 아침 기온을 알리는 뉴스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햇수로 4년째 접어든 고단한 유학생활.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하는 유학이 뭐가 힘드냐고 나이 든 어른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돈에 담긴 그 고단한 때문에 때로는 힘이 든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 또 짧은 직장 생활을 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온 지 8년. 대구는 언제나 그리운 마음의 고향이다.

며칠 전, 경북대학교 건축학과를 다니다 잠시 어학연수를 왔다는 어린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동향이라는 이야기에 울컥해 경북대학교 안의 청담호며 북문과 정문 주변의 맛집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집을 나서면 보일 것 같은 낯익은 고등학교, 중학교 이름들도 모두 타향만리 먼 곳의 이야기일뿐이었지만 잠시나마 옛 생각에 빠졌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친구들 중에는 대구 출신이 꽤 있는 편이다. 서울 8학군 못지않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대구의 부모님들 덕분이 아닐까. 어릴 적 옥상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아마도 그렇게 첩첩 둘러싸인 곳에서 넓은 세상을 모르고 살까봐 부모들은 노심초사하며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시카고는 체감온도 영하 22도.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다. 큰 창문 앞에 서서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고 영어 원서와 싸워야 하는 그런 하루. 다 가리고 눈만 빼꼼 내어놓고 걷고 있을 대구의 지인들을 상상해 본다.

오늘도 더 추운 곳에서 공부하고 있을 딸을 걱정하며 출근길에 나섰을 부모님과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우리 손녀를 볼 수 있을까 전전긍긍 나를 그리워할 여든 살의 할머니, 나를 응원하고 계실 은사님들. 하늘에서 흩날려 떨어지는 눈발들을 보며 마음 속으로 수십 번 중얼거려 본다. 감사하다고, 또 사랑한다고.

김해린(미국 시카고)

♥뛰놀던 널따란 마당도 풀이 무성

내 고향은 성주군 용암면 산골입니다. 중학교 다닐 적에 전기가 공급되었는데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다가 훤한 형광등 전등불빛에서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답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도 있구나! 그때 결심하게 된 것이 산골 소녀로 꿈만 꾸며 살 것이 아니라 도회지로 나가서 꿈을 실현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앞두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나면 밤 10시가 됩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고갯길을 넘어 쌩쌩 달려 가다 보면 겨울의 차가운 밤바람이 목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까지 서늘한데, 산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면 등이 오싹해집니다.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자전거 핸들에 달린 소리개로 '띠링~ 띠링~' 하면 산 노루가 놀라 화들짝 달아나는데 노루보다 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힘껏 달려갑니다.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한 결과 나와 몇몇 친구들은 도회지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학우들은 시골 인근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깃불은 나를 좀 더 밝고 넓은 세상으로 이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 꿈의 터전이었던 고향에 외로이 서 있는 전봇대가 지금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성공을 위해 모두 다 고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석명절마다 조상님의 산소에 가는데, 우리들이 어린 시절 깔깔대며 뛰어놀던 널따란 마당에 풀이 무성하지만, 그 풀 섶에서 깔깔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아직은 그때 살던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정겨운 추억이 되살아나 참 좋습니다.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면 저 돌담도 무너져 내릴까!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문권숙(대구 북구 국우동)

♥쇠풀 먹이던 능선에 웬 빨간 깃발?

파릇파릇한 새싹과 울긋불긋 꽃들의 향연, 도랑에 언 얼음이 녹아 쩍쩍 갈라지는 소리에 땅 밑에 있던 모든 벌레들이 일제히 해동하고 나옵니다. 시골이 고향이란 것은 내게 큰 행운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현관문에 떡 하니 붙여 놓고 나면 정말로 봄이 온 듯 바람 냄새가 다르다는 걸 느끼곤 하지만 시골에서의 봄맞이는 더 큰 감동을 가져다줍니다.

한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정이 들어 타향이 고향 같기는 하지만, 고향이 타향 같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곳이 바로 태초부터 나의 고향으로 점지해 둔 것처럼 고향이란 곳은 엄마의 가슴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무렵에 가 보았더니 산등성이로 이어진 빨긴 깃발이 나풀거렸습니다. 어릴 적 쇠풀 먹이고, 지게 지고 땔감 나무하러 다녔던 저 산에 웬 깃발인가 싶어서 유심히 보았더니 그 깃발이 주인 떠난 잡초 무성한 밭에서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마을 이장을 만나 물어보았더니 어느새 손 큰 누군가의 소유로 넘어갔고 곧 개발이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부터 금액을 높게 쳐 줄 테니 놀고 있는 땅을 팔라며 전화하던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그가 나의 고향을 송두리째 사들였나 봅니다. 그는 땅을 사들였지만, 고향 사람은 우리의 고향을 팔았던 것입니다.

고향을 지키는 일은 선산(先山)을 지키는 일이므로 우리 모두는 고향 지기로 남아야겠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날, 고향 앞으로 GO !!!

김병욱(대구 북구 태전동)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대구백화점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정은숙(대구 수성구 시지동)

다음 주 글감은 '내 고향은…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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