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혼] 제1부-나라사랑 6)독립운동의 성지 경북

입력 2011-02-18 07:56:58

"최초 항일의병 1894년 안동서 시작" 한국 독립운동사 1년 앞당겼

애국지사들의 대한독립만세! 3·1절 90주년을 맞아 경북도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마련한 태극기서명회에 참석한 생존애국지사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마련한 태극기서명회에 참석한 생존애국지사들.
애국지사들의 대한독립만세! 3·1절 90주년을 맞아 경북도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마련한 태극기서명회에 참석한 생존애국지사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조성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마련한 태극기서명회에 참석한 생존애국지사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조성된'나라 위해 살다간 안동독립운동가 1천인 추모벽. 눈꽃 속에 의연히 선 추모벽에 추상같은 절의가 어려있다. .

반세기의 걸친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은 국내외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어떤 지역에는 의병항쟁이, 어느 곳에는 3·1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어느 지방은 구국계몽운동이 활발했고, 어떤 도시는 사회주의 운동이 눈에 띄기도 했다.

하지만 경북은 예외였다. 경북인은 항일투쟁 전 시기에 걸쳐 거의 모든 분야에 참가하는 특징을 보였다. 우선 독립운동의 출발인 의병항쟁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경북이다.

기존의 역사 교과서는 최초의 항일의병이 을미년(1895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었으나, 1894년 갑오년에 경북 안동에서 의병항쟁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이 근래에 밝혀졌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첫 장을 한 해 앞당기면서 51년(1894~1945년)에 걸쳐 가열차게 펼쳐진 독립투쟁의 발상지가 바로 경북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절자가 나온 곳도 경북이고,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가장 많은 곳도 경북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국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는데, 1910년대 말까지 전국의 자정순국자가 90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20%에 이르는 18명이 경북 출신이다.

지금까지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인원은 1만1천870명. 이 중에서 대구경북인이 1천835명으로 전국 도(道)단위 평균의 몇 배에 이른다. 이 수치만으로도 우리 지역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위상을 웅변하고도 남는다.

혁신유림이 등장해 구국계몽운동을 이끌거나, 만주로 집단 망명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며 독립전쟁론을 추구해 나간 중심에도 경북인이 어김없이 있었다. 안동의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끈 류인식·이상룡·김동삼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07년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곳도 다름아닌 대구이다.

대구에서 탄생한 광복회는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의 발전적인 통합을 보여주는 1910년대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단체이다. 광복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이 풍기에서 만들어진 의병계열 조직인 광복단과 합류를 모색한 통합 단체이다. 만주의 독립군기지를 확충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의열투쟁을 벌이기 위해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광복회는 충청권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광복회가 특히 주목을 받는 까닭은 1910년 이전에는 결코 하나로 합류할 수 없었던 의병계열(무력항쟁-군주사회)과 계몽운동계열(실력양성-공화주의)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몇 년 후에 터져나온 3·1운동에서 민주공화정부라는 요구로 표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경북은 3·1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곳이다. 서울에서 시위가 일어난 지 한 주일이 지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5월 7일까지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경북지역의 3·1운동이 보여주는 특성은 무엇보다 투쟁의 강성이다. 3·1운동으로 구금된 인물들의 형량이 6, 7년이 많은 것이 다른 지역에 비해 격렬했던 저항성을 말해주고 있다.

경북은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의 본고장이다.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던 강화회의에 보냈던 파리장서 의거의 인적 구성을 보면 경북 출신들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김창숙·곽윤·이중업의 활약에다 137명의 서명자 가운데 출신지가 명확하지 않은 45명을 제외한 92명 중 60%가 경북 출신이라는 점은 파리장서에서 가지는 지역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 손문 등에게 제2의 독립청원서를 보내려고 했던 시도 또한 대구경북 인사들이 추진한 것이다.

경북인들은 만주지역의 독립군기지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에도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중에서도 경북 출신들이 주로 자리 잡은 곳은 남만주와 밀산지역이다. 유하현 삼원포를 중심으로 한 남만주에는 이상룡·김동삼 등 안동 유림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 출신들이 대거 진출해서 경학사·부민단·한족회·신흥무관학교·백서농장·서로군정서·정의부·혁신의회 등을 건설했다.

1923년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에 뽑힌 인물이 김동삼이요,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위인이 이상룡이다. 간도와 연해주 사이의 밀산지역에는 성주 출신 이승희 주도로 한흥동을 일으켰다. 의용단·주비단 등 남만주 일대로 자금을 보내기 위한 비밀조직이 결성된 것도 대구경북지역이었다.

유림이 전개한 마지막 독립운동이 일어난 곳 또한 대구경북이다.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로 방향을 수정하면서 1925년 가을 국내로 잡입해 군자금 모으기에 나서자 이에 호응한 인물 대다수가 대구경북의 유림이었다.

그래서 일본 경찰은 이를 '경북유림단사건'이라고 불렀다. 상하이(上海)로 되돌아 간 김창숙은 이때 모은 자금으로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로 파견해 조선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시가전을 벌이는 의거로 연결시켰다.

의열투쟁과 사화주의운동에서도 경북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김시현·김지섭·이종암·장진홍 등 의열투쟁사에 빛나는 인물들이 바로 지역 출신이다. 특히 17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냈던 김시현, 일본궁성 파괴를 노렸던 김지섭, 국내 잠입 투쟁 중 옥중 순국한 이종암은 대표적인 의열단원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반입시킨 장진홍과 다물단의 서동일도 의열투쟁 분야에서 돋보이는 인물이다.

대구경북지역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해 민족의 독립을 추구했던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무산자동지회의 이준태,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재봉,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권오설 등이 모두 경북출신이다.

6·10만세운동의 핵심을 이룬 인물들도 대구경북인이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 조선공산당 상해부의 김단야(김태연), 연희전문의 권오상, 중앙고보의 류면희·이선호·권태성 등이 그들이다.

1940년대 들어 징병과 징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는 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구경북의 독립군적 조직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백의단·문예부·연구회·다혁당 등으로 연결되는 항쟁을 벌였고,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은 태극단으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조선회복연구단이란 이름으로 의열투쟁과 전투를 지향했다.

1940년대 대다수의 문인들이 친일의 물결에 휩쓸릴 때 민족문학의 찬란한 꽃을 피워올린 저항시인 이상화와 이육사의 이름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일제에 대한 경북인의 저항은 이토록 격정적이고 지속적이었으며 그만큼 희생 또한 컸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은 "경북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며 "경북인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과 나라사랑 정신이야말로 세계의 식민지해방투쟁사에 유례가 없는 최고의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고 말한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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