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진료실에는 날마다 무지개가 뜬다. 늦가을부터 천리향이 필 무렵까지 이어진다. 적당히 칸을 지른 유리창이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고개만 들면 창밖의 댓잎이 손짓하는 것 같다. 그 풍경은 내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살아 있는 순간이 행복이라고 느낄 때도 있다. 동시신호이던 교차로, 직진 후 좌회전으로 바뀐 것을 깜빡했다. 초록색으로 되는 것만 보고 핸들을 꺾는 순간 날카로운 경적에 멈췄다. 사고로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아 있다'라고 했다. 가족뿐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고 알아주는 닮고 싶은 이를 만날 때면 참 행복하다.
날마다 나는 선택을 한다, 행복과 불행 중에 행복한 쪽을. 부산하던 진료가 끝나 갈 무렵, 문 앞에 서서 유심히 나를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손짓하니 아이와 뒤따르던 엄마가 반가운 표정을 한다. 지난해에 입원을 하여 해가 바뀌고도 열흘이나 지날 때까지 햇수로는 2년이나 병원 밥을 먹었던 아이다. 길고 고통스러웠던 시간 동안, 어린애가 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어떠냐고 물으니 퇴원을 하자마자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회진을 하는 내 흉내를 내며 잘 논다는 것이다. 장난감 진찰세트를 사달라고 해서는, 날마다 의사놀이를 하고 장래의 꿈까지 나처럼 될 거라고 해서 우습다고 했다.
신종플루 치료 후 퇴원을 생각할 무렵 다시 열이 오르고 호흡곤란으로 고생했던 병약한 아이다. 밤새 보채는 아이를 안고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어린 것을 돌보느라 무척 힘들고 애처로웠을 터이지만 부모의 표정은 평온했다.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믿고 맡긴다는 눈빛이었다.
회진을 가면 제일 먼저 그 애에 대한 보고다. 요즈음에 참으로 보기 드문 부모라는 칭찬이다. 저런 심성의 보호자라면 몇 날 밤을 새워서 치료해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단다. 의료진을 무조건 믿고 맡기고 보호자 역할에는 온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해돋이로 들뜬 분위기의 새해가 되어도 집에도 못 가보는 그들이 맘에 걸렸다. 저녁 무렵 아이의 병실에 들렀더니 놀고 있는 아이와 함께 앉아 있던 부모는 놀라 일어섰다. 내가 다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이 시간에 어떻게…" 한다. 그 표정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보람이 느껴졌다.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고 싶다. 아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찾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라'라는 말처럼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느끼는 자의 것일 테니까.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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