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해적' 시대…살인·납치 일삼는 국제적 불한당

입력 2011-01-29 08:20:00

소말리아서만 1억5천만달러 돈벌이

해적들이 설치고 있다. 국제사회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른 해적들은 영화나 만화에서 보던 해적들과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해적이나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해적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원피스' 주인공 루피는 의리에 죽고 산다.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패로우(조니 뎁) 선장은 소신을 가진 낭만적인 해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해적들은 돈에 눈이 멀어 살인과 납치를 일삼는 국제적인 불한당이다. 해적질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 때문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박도 잇따라 피랍되고 있다. 글로벌화 되고 있는 디지털 지구촌에 파편처럼 홀로 떨어져 나간 아날로그 같은 해적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신(新)해적 시대를 조명했다.

◆21세기 해적의 모습

주로 기동성 있는 소형 보트를 타고 다니며 약탈을 한다. 보트에는 보통 사다리가 실려 있다. 나포한 배에 오르기 위해서다. 무장 수준은 만만치 않다. 자동소총을 소지한 것은 기본이고 로켓을 보유한 경우도 많아 중무장한 군함이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점점 기업형 해적단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도 신해적들의 특징이다. 해적질을 통해 모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조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들의 존재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직접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고 전문 브로커를 이용해 몸값 협상 등을 진행하고 있는 추세다. 최근 전문 브로커의 본거지로 지목된 곳은 영국 런던이다. 런던에 있는 전문 브로커들은 거래를 알선해 주고 막대한 뒷돈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 해적 산업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케냐 주간지 'The East African'은 "소말리아 해적들은 돈 세탁을 통해 나이로비에 고가 부동산을 구입하고 런던에 수익금을 송금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해적 출몰지역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을 비롯해 기니만, 지브롤터해협, 지중해 연안, 아라비아해 연안, 남중국해 연안(말라카해협), 카리브해 연안 등이 해적 출몰지역으로 분류돼 있다. 이들 지역은 해상교통 요충지여서 옛날부터 해적이 들끓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카리브해는 16~18세기 스페인·영국·프랑스의 식민지와 본국을 잇는 중요한 무역 경로였고, 지브롤터해협과 지중해 연안은 로마시대부터 해적이 출몰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에 있는 말라카해협은 극동과 유럽을 잇는 중요한 통로다.

아덴만은 인도양과 지중해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출발한 선박이 홍해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유럽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다. 1년에 2만~3만 척의 선박이 이곳을 지난다. 특히 세계 원유 수송량의 30%를 실은 유조선들이 수시로 아덴만을 통과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해적 출몰이 잦고 피해도 극심하다.

◆아덴만이 해적천국이 된 이유

사냥감(배)은 많은데 천적(치안 조직)이 없으면 어김없이 해적이 출몰한다.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해적은 사라진다. 과거 5대양을 누비던 해적들이 현대에 들어 급감한 가장 큰 이유는 강력한 천적의 등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해군이나 해양경찰 같은 조직이 잘 갖춰지면서 해적들의 설 땅이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해안 치안력을 잘 유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외 지역이 존재한다. 바로 소말리아다. 소말리아는 대표적인 치안부재 국가다. 천적이 없으니 소말리아 해적들이 아덴만에 나가 수많은 사냥감들을 노리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현재 아덴만에 출몰하는 해적의 십중팔구는 소말리아인들이다. 소말리아에 해적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말리아는 1991년 내전이 발생하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오랜 내전으로 소말리아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됐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물건을 사려면 돈을 세서 주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달아서 값을 지불해야 할 정도다. 가뭄까지 겹쳐 농업기반마저 무너졌고 외국 어선들의 싹쓸이 조업으로 인해 어장도 황폐화됐다. 실업률이 75%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국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소말리아인들이 선택한 길은 해적질이었다. 무기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내전이 발생하자 미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이해 득실에 따라 군벌에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내전이 소강 상태 접어 들면서 지천에 널린 것이 무기였다. 내전으로 완전히 무너진 해안 경비도 해적질을 맘놓고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현재 소말리아는 12개 군벌이 지배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수도인 모가디슈에서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지방은 군벌이 장악했고 해안은 해적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 소말리아의 현주소다.

◆호황 누리는 해적산업

지난해 소말리아 해적들이 벌어들인 돈은 1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적질이 소말리아 경제를 떠 받치는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한 셈이다. 성공하면 한 번에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해적은 소말리아에서 부를 거머 쥘 수 있는 최고의 인기 직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해적에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적 관련 산업도 발달하고 있다. 해적선을 전문적으로 수리해 주는 기술자가 생겨나고 연료와 식품을 대주는 공급책도 등장했다. 해적들이 몸값으로 받아온 돈을 세탁해 주는 전문 조직도 있다고 한다.

한편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최근 보안전문회사 AKE 및 인질협상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지난해 전 세계 해적 및 납치산업 규모가 10억 파운드(1조7천880여억원)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납치범들은 인질을 '걸어다니는 황금'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들이 요구하는 몸값은 최소 1만달러에서 수백만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해적과 협상은 없다"

해적이 활개를 치면서 국제 사회의 대응방침도 강력해 지고 있다. 인질의 안전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특공대를 투입해 인질을 구출하는 작전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 프랑스의 경우 2008년 4월 이후 자국 선박이 4번이나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됐지만 모두 군사작전으로 해결했다. 미국도 2009년 4월 머스크-앨라바마호가 납치돼 선장 1명이 인질로 잡히자 특수부대를 동원, 해적 3명을 사살하고 선장을 구해냈다. 한국도 최근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선원을 구하기 위해 UDT를 투입하는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청해부대가 작전을 펼치던 날 말레이시아도 특수부대를 동원해 해적에게 잡혔던 선원 23명을 구출했다.

세계 각국이 적극적으로 해적 소탕 작전을 펼치는 이유는 몸값을 지불하는 미지근한 대책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번 몸값을 지불하면 두 번, 세 번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호주얼리호 피랍을 두고 지난해 피랍된 원유 운반선 삼호드림호를 인도 받기 위해 해적들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의 몸값이 전달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군사작전 최선일까?

군대를 동원한 강경 진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군사작전은 인명 피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번에 펼친 '아덴만 여명작전'에서도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활동 중인 유럽연합(EU) 해군은 인질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인질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군사작전은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위험한 군사작전보다는 피랍을 예방하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위험지역을 운항하는 선박의 경우 비용이 들더라도 민간 무장 요원을 탑승시키고 선박 안에 대피시설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지난해 9월 독일 국적의 컨테이너선 마젤란스타호 선원 11명은 해적들이 출몰하자 배의 전원공급장치를 차단한 뒤 비상식량을 챙겨 선원대피처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해적들은 배는 탈취했지만 복잡한 구조의 항해장치를 다룰 수 없어 선박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사이 선원들의 신고를 받은 미군 군함이 나타나 해적들을 모두 생포한 사례가 있다.

구축함을 더 파견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한국은 현재 최영함 1대만 아덴만에 파견한 상태다. 최영함이 보급을 위해 항구로 들어갈 경우 한국 상선을 보호할 유일한 '안전판'이 사라진다. 구축함을 더 건조해 추가 파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제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아덴만 일대에는 25개국에서 파견한 구축함이 자국 상선 보호를 위해 활동 중이다. 하지만 국가 간 협조는 미흡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맺은 아시아해적퇴치협정(ReCCAP)의 성공적인 정착에 주목하고 있다. 말라카해협에 해적들이 난립하자 아시아국가들은 아시아해적퇴치협정을 맺고 싱가포르에 해적정보공유센터(ISC)를 설치하는 등 조직적인 대응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들은 인류애적인 해결책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오랜 내전으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소말리아인들의 사정을 감안해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 국제사회가 협력해 소말리아의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소말리아인들이 대를 이어 해적이 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라는 지적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2006년 이후 소말리아 해적 한국 관련 선박 피랍 일지

▷2006년 4월 4일=원양어선 제628호 동원호. 한국인 8명을 포함한 선원 25명 피랍 117일 만인 7월 30일 석방.

▷2007년 5월 15일=한국인 4명이 탑승한 원양어선 마부노 1· 2호. 173일 만인 11월 4일 석방.

▷2007년 10월 28일=한국인 2명 탑승한 일본선적 골든노리 호. 1명은 당일 탈출했지만 나머지 1명은 피랍 45일 만인 12월 12일 석방.

▷2008년 9월 10일= 한국인 선원 8명이 탑승한 선박 브라이트루비호. 37일 만인 10월 16일 석방.

▷2008년 11월 15일=한국인 5명이 탑승한 일본 화물선 켐스타비너스호. 88일 만인 2009년 2월 13일 석방.

▷2010년 4월 4일=한국인 5명이 탑승한 삼호해운 소속 원유 운반선 삼호 드림호. 217일 만인 11월 6일 석방.

▷2010년 10월 9일=한국인 2명 등 선원 43명이 탑승한 통발어선 금미 305호. 석방 협상 진행중.

▷2011년 1월 15일=한국인 8명이 탑승한 삼호해운 소속 삼호주얼리호. 피랍 7일 만에 해군 최영함 구출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