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만들어가는 것

입력 2011-01-28 10:56:56

여기에 처음 쓰는 칼럼이니 그래도 박물관 언저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오늘날 우리가 찾는 박물관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전시된 문화유산의 역사성에 비교해 보면 전시 시설인 박물관은 아직 젖먹이에 불과하다. 2009년이 우리나라 박물관 역사의 100주년이었으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는 대중이 차별 없이 관람할 수 있는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에 한정된 역사이다. 고대 기록에 나오는 왕실의 보물 창고나 희귀한 동식물을 키웠던 시설도 오늘날의 기준에 따르면 박물관에 해당하지만, 관람객이 제한된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과 많이 다르다. 근대 박물관의 대중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람에서의 평등함은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박물관의 기본 정신이다. 여기에 매우 귀중한 정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참여이다.

우리 박물관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참여는 경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1년 9월 경주에서 후일 '금관총'이라 이름을 붙인 신라 능묘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경주 시가지로 접어드는 길목에 위치한 어느 주막에서 공사 도중에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은 부장품이 드러났다. 이 기막힌 발견은 이집트의 투탕카멘 발굴에 비교된다며 언론이 속보로 세상에 알렸고, 이를 보려는 사람들이 기차마다 넘쳐났다. 경주 거주 일본인들과 뒤늦게 도착한 일본제국주의 관학자(官學者)들은 세상의 관심을 서로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 다투었다. 아울러 발견된 유물은 보고서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옮기려 하였다.

이때 경주 사람들이 나섰다. "우리 선조들의 유물은 마땅히 이곳에 두고 자손의 손으로 보존하고 싶다. 그 보존에 특별한 설비가 필요하다면 우리 손으로 짓겠다"고 하였다. 이 뜻은 내화 구조의 전시 시설 건립으로 실천되었고, 경주로 되돌아온 금관총 발견품은 1923년 10월 이 건물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관변단체인 (재)경주고적보존회가 운영하던 사설의 진열관은 1926년 6월 20일에 국립 시설인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승격되었다. 한동안 이 일은 경주 사람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단지 지금 너무 아쉬운 점은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간 몇 해 뒤인 1978년에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헐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는 참여가 있다. 1954년 10월 10일에 문을 연 국립경주박물관의 박물관학교이다. 곧 환갑을 맞이할 박물관학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최장수 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이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두 번째 관장으로 오셨던 진홍섭

선생님과 해방 후 경주에 들어온 윤경렬 선생님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분위기를 이겨내고 역사도시 경주에서 본인들의 재능을 사회에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셨다. 고민의 해결책은 경주가 위락 시설로 가득 찬 평범한 관광지가 아니라 문화유산의 보고로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희망하고, 어린이들에게 문화유산의 의미와 소중함을 가르치면 미래에 희망이 살아난다고 믿는 것에서 찾았다. 그 실천으로 경주박물관 안에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박물관학교를 연 것이다. 취지에 동의하신 몇몇 경주의 어른들도 두 분의 뜻에 동의하며 십시일반 자신의 재능을 나누어 내었다. 지금에야 되돌아보면 뜨내기로 비쳐졌을 두 분의 다소 저돌적인 실천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하여튼 박물관학교는 매번 성황리에 열렸고, 무료로 박물관을 드나들고 환등기와 함께 신라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도 볼 수 있었으니 그 당시 악동들에게 꿈의 동산이었다. 더불어 1956년에 결성된 '신라문화동인회'의 회원은 모두가 박물관학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는데, 1972년에는 '박물관학교 뒷받침회'까지 만들었다. 박물관학교를 거친 이들은 자라나 신라문화동인회의 회원이 되고, 각자의 재능을 나누어 또다시 박물관학교를 뒷받침하는 선순환의 구조가 오늘날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실천되고 있다.

문화에는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주어진 것에 머무르지 않고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것에는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모두 문화의 주체로 참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아울러 매일신문이 1957년 11월 22일부터 2년간 연재한 '어린이박물관학교'라는 칼럼은 이후 박물관학교의 주요 교재가 되었고, 지금 역사로 남아있다.

함순섭(국립대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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