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헌혈

입력 2011-01-28 07:28:20

누나 출산하다 위독해져 헌혈증이 급하게 필요했는데…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대구백화점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명수(대구 달성군 현풍면)

다음 주 글감은 '정월대보름'입니다

♥매형 대신 수술확인서 도장 찍고

누나가 셋째 아기를 출산한다며 급하게 전화를 했다. 마침 매형이 장거리 출장 중이라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앞당겨 출산하는 바람에 보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젊은 총각이 산부인과 병동에서 동분서주하니 간호사가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하다며 제발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데도 진통은 계속되고 아기는 도무지 세상을 나올 생각조차 안 하는지 누나는 그만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흘리며 곁을 지켜주지 못하는 매형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삐삐'를 해 놓고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도 오지 않는 매형을 대신해서 산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수술확인서에 지장을 찍게 되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일이 꼬이다 보니 헌혈까지 해야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혈액형이 다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 헌혈에 대한 무관심과 부정적 인식으로 한 번도 헌혈을 한 적이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다. 헌혈증이 있느냐고 묻는 말에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아무데나 끼어드는 오지랖 넓은 친구가 헌혈증을 모아두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누나가 위독해서 병원에 있다'고 말하자 당장 달려와 주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보니 '참으로 인정 많은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남자가 촐랑댄다고 별로 친하고 싶지 않던 그 친구가 뜻하지 않게 도와주어 정말 고마웠다.

어느덧 세월이 20년이나 흘렀다. 그때 그 아기가 성장하여 군 입대를 앞두고 외삼촌께 인사하러 왔다며 싱글벙글 하며 들어섰다. 꼭! 하는 폼이 촐랑대던 내 친구를 닮은 것 같아 성격 좋고 인간성 좋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아, 군 생활 잘 하고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도와주거라"하며 긴박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얼마 전에 친구와 둘이서 재미로 헌혈을 했다며 '그게 그럴 때 필요하구나'라고 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학습인 것 같다.

문익권(대구 달서구 유천동)

♥아이 손 잡고 헌혈의 집 방문

1987년 한여름 어느 날 내 인생의 첫 헌혈은 술 때문이었다. 아니다. 헌혈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돈 받고 거래했던 것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술 마시는데 필요한 몇 천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헌혈도 있었지만 우유 하나에 빵 하나로는 그 보상이 미흡하다고 생각했나보다. 당연 헌혈증서는 받지 못했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전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 후 몇 년 뒤 군대에서 단체 헌혈의 경험이 진정한 헌혈의 처음이었다. 30분 동안 훈련에서 빠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기회가 되면 당연 참여해야 했다. 대학시절엔 나도 건장한 남자임을 이성에게 증명하는 나름의 방법이었으니 또 참여하게 되었고, 사회 복귀 후 몇 번의 헌혈이 진정한 내 삶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결혼 후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급우가 위급한 상황이 되어 헌혈증서 모으기를 했는데 그때 아이의 손에 그간 모아뒀던 증서를 쥐어줌으로 헌혈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아이와 함께 헌혈의 집을 방문한다. 굵은 바늘이 아빠의 팔을 뚫고 들어가면 이렇게 물어본다. "아빠 안 아프나?" 또 붉은 피가 모여지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이렇게 질문한다."이만큼 뽑아도 아빠 괜찮나?" "나도 해도 되나?" 물론 빵과 음료수는 아들 몫이 되고, 선물 받을 때는 자기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한다. 그러면서 뒤돌아 나오면서 하는 말. "아빠 언제 또 올 거야?" 물론 두 달 후에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방문할 것이다. 아이에게 아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쩌면 그 옛날 헌혈의 부끄러운 첫 경험에 대한 나름 보상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용욱(포항시 북구 흥해읍)

♥ "올해 열 번 채우는 게 목표"

이른 새벽, 4시만 되면 여느 때처럼 시계 벨이 단잠을 깨운다.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난 남편은 출근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나는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몇 안 되는 식구지만 각자 직장으로, 도서관으로 아침이면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다들 주어진 일이 끝나고 하루 해가 저물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두 딸은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는 순간, 큰 딸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엄마! 나 오늘 또 헌혈 했어. 올해 안으로 열 번 채우는 게 내 목표야."

사실 작년에 처음 헌혈을 하고 왔을 때, 나는 큰 딸에게 왜 헌혈을 했느냐고, 몸도 약한데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 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봉사활동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헌혈을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으로 인하여 누구 한 사람의 생명에 도움이 된다면 평생 헌혈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 자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딸이 솔선수범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고맙고 기특했다.

꽃피는 봄이 지나고, 낙엽이 지는 겨울이 오듯이 우리 인간도 그 아름답던 젊음이 다 지나가고 병들어 나약해져 있을 때, 한 방울의 피로 인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면 그 이상 더 큰 고마움이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1년에 한 번만이라도 용기를 내서 헌혈을 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나부터 딸의 손을 잡고 헌혈의 집으로 가보려고 한다. 이제는 딸이 헌혈을 하면서 느꼈을 보람과 기쁨을 나도 함께 느끼고 싶다.

김귀분(대구 중구 남산3동)

♥남편 헌혈증서 친구에 건넸더니

초등학생을 둔 친구가 갑자기 전화가 왔다. 딸아이랑 목욕탕을 갔는데 갑자기 온몸이 울긋불긋하니 두드러기처럼 돋아난다고 전화를 받고 바로 옆에 거주하기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증상이 그냥 있어서 될 것 같지 않아 병원을 가보라고 했더니 더 기다려보겠다던 친구는 캄캄한 밤이 돼서야 병원에 갔다.

지언이가 백혈병이래. 난 친구한테 달려갔고 친구는 딸아이를 껴안고 엉엉 한없이 울기 시작했다.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난 정말 나쁜 짓 안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를 안고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골수를 이식받기 위해 검사를 했고 일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동안 한번 터졌다하면 멈추지 않는 코피 때문에 수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난 남편이 총각시절에 헌혈한 증서를 친구한테 건넸더니 그제야 친정으로 시댁으로 헌혈 증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 년이라는 투병 끝에 지언이는 퇴원하게 되었다.

커서 간호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겠다던 지언이는 지금 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지언아! 주사만 보면 기절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간호사 됐니?"

이유진(대구 북구 복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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