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13)새마을 사업 우수 마을, 기계면 문성마을

입력 2011-01-27 14:54:19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지방장관 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 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였다.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이른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 태동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벌여 보도록 합시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 제1차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 전국 3만3천267개 마을에 각각 시멘트 335포대가 무상 지원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자체의 자금과 노력으로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잘 해낸 곳이 있었는가 하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마을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성과가 뚜렷한 1만6천600개 마을에 대해 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을 무상 지원하면서 자발적인 협동 단결을 유도하였다.

그 같은 선별적 지원 방식에 힘입어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초기에는 단순한 생활환경 개선과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데 치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조가 형성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농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1974년부터는 도시'직장'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상회를 통한 이웃 알기와 내 집 앞 내가 쓸기, 저축하기와 거리질서 확립 캠페인을 벌였으며, 건전한 직장 분위기 조성과 생산성 향상 같은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농촌개발 사업의 수준을 뛰어넘어 조국근대화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영일군(지금의 포항시) 기계면 문성마을은 하천 건너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그로 해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5'16 후 홍선표라는 젊은 이장을 선출하여 힘을 합해 좀 더 잘 살아보자며 소득증대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1967년 극심한 한해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선표 이장과 홍순락 씨 등이 나서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지하수 개발과 양수장을 설치함으로써 수리안전답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그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잘 살기 운동이 추진되었다.

그 뒤 1971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성마을에서는 지도자 이석걸(82) 씨와 이장 홍선표(82) 씨가 앞장서서 마을안길 넓히기'지붕개량'지게 벗기 운동'리어카 보급 같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생활환경 개선과 함께 소득증대 사업을 통해 잘 사는 마을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하였다. 성공 사례는 널리 파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9월 17일 문성마을에서, 그 해의 실험사업을 결산하는 전국 시장'군수 비교행정 현지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 자리에서 유시(諭示)를 통해 이렇게 지시하였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란 한마디로 정부가 농'어촌에 투자하는데 있어서, 주민들의 자조정신'참여의식'협동심'단결심'근로정신이 왕성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빨리 일으켜 세워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개발과 정신개발의 병행 운동이자 국가발전의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

회의에 이어 문성마을을 돌아보았는데, 국무위원을 비롯한 전국의 시장'도지사와 시장'군수가 함께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국의 시장'군수는 돌아가서 문성마을과 같이 지도하고 실천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우수한 마을 지도자를 발굴 육성하는데 힘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부강한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므로, 주민들의 자조'자립'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새마을 정신' 고취에 진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새마을 운동의 태동에 관하여 서로 엇갈린 주장이 있다. 청도읍 신도마을과 기계면 문성마을이 서로 자기네 마을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원조' 다툼이다. 두 마을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만, 정부의 기록물 어디에도 '발상지'라는 표현은 없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결론이 나지 않자, 문성마을에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에서 심판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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