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지 '물성'에 예술 '화두' 입히다

입력 2011-01-27 08:11:38

영담한지미술관장 영담 스님

"한지를 창문에 붙여놓으면 낮에는 하루 종일 햇빛이 놀다 가고, 밤에는 달빛이 은은히 스며들어요. 이렇게 아름답고 실용적인 한지의 윤회 고리를 살리고 싶습니다."

영담 스님(영담한지미술관 관장)은 지난해 12월 말,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한지를 직접 만들어 제작한 그의 작품은 독특한 미감으로 주목을 받았다.

32년간 한지를 직접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올해 가을쯤 한국닥종이문화학교(가칭·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한옥마을 내)를 개관할 계획이다. 한지박물관과 미술관, 체험학교를 하나로 아우른 전국 최초의 시도다. 청도군과 경상북도의 일부 지원을 받지만 대부분 사재를 털어 짓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전통 한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담 스님의 한지 사랑은 어릴 적 기억과 닿아있다. 부친이 한의사였던 그는 첩약 싸던 종이가 그렇게 좋았다. 집에서 닥을 삶아 종이를 만들 때면 몰래 훔쳐다 벽에 던져보기도 했다. 종이에 대한 정(情)은 출가 후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스님은 출가 후 '자급자족'을 하고 싶었다. "신도들에게 기대기 싫어 자급자족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전통 종이의 맥을 스님들이 지켜왔다는 것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나도 종이를 만들어보자 싶었죠."

종이는 사람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 정신문화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종이이지만 요즘은 그 신세가 처량하다. 한지라고는 하지만 순수 한지는 점차 사라지고 표백제 같은 화학 약품이나 재료를 섞는 한지가 오히려 많아지고 있다. 가격 경쟁력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잃어버린 말들이 안타깝다. "우리 종이 종류가 백가지가 넘어요. 문종이, 야들종이, 보들종이, 서간지, 장지, 삼배지…. 하지만 요즘은 이 말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지'로만 통용되죠. '종이'라는 순 우리말은 화학재료로 만든 양지에 빼앗겼죠."

그래서 그의 손은 더욱 신중하다. 굴절된 문화와 정신을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그는 전통 방식 그대로 한지를 만든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 닥나무를 채취하고 봄이 되면 본격적으로 종이를 만든다.

그는 한지를 직접 만들어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한지에 볏짚, 지푸라기, 겨, 머위줄기, 솔잎, 돌멩이 등 자연재료를 섞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뽕잎, 감물 등을 넣어 자연의 색감을 보여준다. 한지 견본집 '우리종이 백가지'를 손수 제작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갖가지 자연물로 만든 한지 100여 장이 곱게 자리잡고 있다.

그는 종이는 '편편하다' '희다' '네모지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 했다. 그의 작품은 형상을 절제하고 한지 물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지의 아름다움에 그만의 미감을 더해 독특한 현대미술 작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소재는 전통 한지이지만 가장 현대적으로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도 인기다. 올해 미국 뉴욕 첼시 갤러리에 전시될 예정이며 워싱턴 타운슨 대학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최근 정부 차원에서 한지 분야에 수백 억원을 쏟아부었지만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다. 진정한 한지 부흥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은 한지를 예찬하지만 한지 공장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농촌에는 돈이 안 된다고 닥나무를 잘라버리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한지의 생산부터 소비까지 윤회 고리를 되살리는 겁니다. 농가에서 닥나무를 키우고 이것으로 제대로 된 한지를 만들어 수요처를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모두 제 역할을 할 때 한지의 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죠."

이것이 스님이 한국닥종이문화학교를 짓는 이유다. 청도 일대에 닥나무를 심고 한지 제작자 및 공예가를 길러내면 전통을 지키는 것은 물론 모두에게 이익이 될 거라 확신한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미 영담한지미술관 한 해 방문객 수가 2만여 명에 달한다.

우리 한지는 우수하다. 닥나무 섬유가 길어 부드럽고 질긴데다 중성에 가까운 약알칼리성으로 천년을 간다. 우리 산천에서 나는 닥나무가 특히 질이 좋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닥나무가 특히 많아 경북에 종이공장이 가장 많았다. 요강, 안경집, 가방 등 한지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그는 "이렇게 종이를 무궁무진한 용도로 사용하는 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고 말한다.

그는 '전통'과 '예술'에 대한 깊은 화두를 지니고 있다. "전통은 우리시대에 맞게 재창조돼야 합니다. 박제된 전통은 결국 재현의 맥조차 끊기게 하죠. 사람이 편안한 예술, 그것을 위해 한지는 무궁무진한 현대미술의 소재입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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