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 추위보다 더 시리고 아픈 '냉골 가슴'
이준범(가명·50·경북 성주군) 씨는 겨울이 두렵다.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낀 지 벌써 6년 째, 연탄 보일러를 돌려도 집 안에 따뜻한 온기가 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비닐 하우스'라고 부른다. 비닐로 된 벽, 희미한 연탄불과 전기 패널은 한반도를 덮친 30년 만의 강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 고통스럽다. 이 씨의 가슴을 더 시리게 하는 것은 미경이(가명·15·여) 삼남매다. 아이들 가슴 언저리에 든 멍은 추위 탓이 아니라 엄마의 빈자리 때문이다.
◆ 마을의 종점, '비닐 하우스'
70가구 남짓 모여 사는 경북 성주군의 작은 농촌 마을. 이 마을 꼭대기에는 종점이 있다. 버스가 아닌, 사람이 사는 마지막 집이 있는 곳이다. 이 씨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지독한 가난의 냄새가 배어있다. 길가에 내팽개쳐진 노란 물탱크, 집 앞에 가득 쌓인 연탄재, 무덤 앞 빨랫줄에는 후줄근한 빨래들이 널려있다.
이 씨의 집은 비닐로 된 외벽에 나무 판자로 방을 만들었다. 나무 판자 네 개로 된 방 세 칸이 미경이와 동규(가명·14), 미주(가명·13·여)를 위한 공간이다.
이 씨는 안방에 들어선 취재진을 아랫목으로 이끌었다. 아랫목에 깔린 전기 패널에서 미미한 온기가 올라왔다. 칼바람을 막기에 비닐은 턱없이 약했다. 이 씨는 판자로 만든 나무 벽 사이에 아이들 옷을 둘둘 말아 넣어 바람을 막았지만 역부족이다. "연탄을 안 쓰면 겨울을 날 수가 없어요." 이 씨는 한 장에 550원하는 연탄 6장으로 하루를 버틴다.
겨울이 추위와 싸움이라면 여름은 쥐와의 전쟁이다. 더워서 문을 열어두면 쥐와 바퀴벌레가 제 집 드나들 듯 한다. 식탁에 올려둔 음식은 쥐의 차지가 되는 통에 음식은 무조건 냉장고에 넣어둔다.
대낮인데도 불을 켜지않으면 집안은 어둠 속에 파묻힌다. 단열을 위해 비닐하우스 지붕을 검은 비닐로 감쌌기 때문이다. 형광등 불빛도 어둠을 채 밀어내지 못했다. 춥고 어두운 집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책보다 TV를 본다. 이런 환경에서 책을 읽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이 씨는 삼남매의 시력을 걱정했다. 막내 미주가 비닐 집으로 이사온 뒤 안경을 쓴 것도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고 했다.
◆잔인한 모정
아이들은 엄마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막내가 6세 되던 해에 엄마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엄마는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챙겨 떠났다. 엄마는 당시 이 씨 아버지 소유였던 논과 밭, 집을 담보로 2억여원을 대출받아 집을 나갔다. 엄마가 떠나기 전만 해도 이 씨는 부농이었다. 마을 일대 논밭은 거의 다 이 씨 아버지 소유였고 참외 농사를 지으며 동네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이 씨는 한 때 자신의 집이었던 마을 입구의 한옥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린다.
건설 현장 일용직과 주물공장 등 온갖 궂은 일을 했지만 농사꾼이 돌아올 곳은 결국 고향이었다. 이 씨는 참외농사를 다시 짓기 위해 1년 임대료가 200만원인 비닐하우스 5동을 빌렸다. 참외는 혼자하기엔 힘이 부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농사다. 이 씨는 상품성 있는 1등급 참외를 수확하지 못하고 겨우 적자를 면하는 처지다. 그래도 그는 매일 파란 트럭을 몰고 밭으로 향한다. 정부 보조금에 의지하며 사는 무능한 아빠가 되기 않기 위해서다.
◆ 꿈을 잃은 아이들
"선생님이 되겠다"던 미경이는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는다. 남을 가르치고 희망을 선물해야 하는 직업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꿈을 묻는 질문에 미경이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며 눈물을 주루룩 쏟아냈다. 꿈을 가지라고 권하기에는 아이의 현실이 너무 차가웠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비닐 집에서 살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엄마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가엾고 안쓰럽다. 동네 주민들이 이 씨에게 '애들이 인사를 안 하고 버릇없다'고 말해도 꾸짖지 못한다. 야단치면 더 풀이 죽을까봐 걱정돼서다.
삼남매는 도통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말을 걸어도 막내 미주는 등을 돌리고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둘째 동규는 인기척이 들리자 후다닥 집을 뛰쳐 나갔다. 성주군청 주민생활지원과 김유경 씨는 "2년 전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아이들이 인사도 안 하고 집 안에 꼭꼭 숨어 있었다"며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신체는 계속 성장했지만 가슴 속 상처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아이들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우리를 버리고 떠난 엄마와 낡은 비닐 하우스. 삼남매의 가슴 속은 언제나 차가운 겨울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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