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귀 힘 빌려 짐 나르던 길…이젠 터널 속으로 자동차 씽∼
청도 팔조령(八助嶺) 고갯길에는 세 갈래 길이 있다. 1998년 터널이 개통되면서 차량이 꼬리를 물고 오르내리는 국지도(30호) 길과 마을주민들의 부역을 통해 신작로로 개통된 팔조령 구길, 그리고 조선시대 영남대로 길로 애용된 옛길이 있다.
조선시대 괴나리 봇짐을 맨 길손들은 팔조령 고개 밑에서 큰 숨을 한 번 쉬어야 했다. 청도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영남대로 옛길이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관로로 이용됐으며, 길이 워낙 벅차 화물은 소와 당나귀 등 짐승이나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영남대로 옛길은 팔조령 터널이 뚫리면서 길의 일부가 끊어진 상태이다. 옛길을 찾고 문화 자원을 복원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때다.
◆구름도 쉬어가는 고개
팔조령 고갯길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짧고 급하다. 산봉우리를 쳐다봐도 한눈에 쳐다볼 수 없을 정도다. 해발은 400여m이지만 청도 쪽의 팔조령이나 달성군 가창면 진터에서도 고개 마루까지의 거리가 짧고 가파르다.
팔조령 구길에는 60, 70년대 비포장길의 아련한 추억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인근 풍각지역에서도 부역을 나와야 했고, 팔조령 산길을 넓히는데 동원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 경부선 철도 부설에도 주민들의 인력동원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서면 임형수(52) 씨는 "76년도 당시 만원 버스가 한번 만에 커브를 돌지 못해 운전기사가 애를 먹는 기억이 난다"며 "청도 풍각에서 제사를 모시고 대구로 돌아가는 밤길에 머리카락이 곤두서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길은 이제 호젓한 산길로 변모하고 있다. 천천히 차로 오르는 왕복 30여분 동안 다른 차가 오기를 기다려 봐도 별로다. 고개 밑 휴게소 업주 정영식(59) 씨는 "주말이면 간간이 들르는 사람이 늘긴 하지만 터널이 뚫리기 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대신 구길은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의 모임장소, 악기를 불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휴식처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청도 방면 야경과 새벽 안개 낀 전경은 일품이다. 휴게소 벽면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구가 깨알처럼 적혀 있다.
청도군은 구길을 대구와 밀양을 연결하는 광역자전거도로(26.6㎞)로 정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길은 청도천 생태강변 자전거도로와 유천교 자전거도로와 연결될 예정이다.
박충배 이서면장은 "옛 추억을 더듬어 자연과 어울리는 억새길을 조성할 계획"이라면서 "편안한 휴식공간을 계속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영남대로 청도 옛길의 흔적
팔조령 영남대로 옛길로 떠나기 위해서는 이서면 양원리(샛별장터)에서 기점을 잡아야 한다. 옛길은 신촌리를 지나 팔조리 아래·위 마을을 지나 청도와 대구 경계지점인 팔조령으로 나있다.
신촌리를 지나 팔조리 마을까지는 비교적 직선 길이다. 길을 따로 찾지 않아도 될 만큼 곧다.
동행한 군 관계자는 "조선시대 길은 지형지물의 장애가 없으면 무조건 가장 빠른 직선 길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마을주민들은 이 길을 포장해 신작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 길은 팔조저수지 부근까지 이어진다.
팔조리 윗마을 팔조 저수지 인근 못마루매운탕 식당 앞에는 수백 년 전부터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은 성황당이 있다. 파란색 기와로 지붕을 새로 입혀놓은 성황당은 옛 모습을 찾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성황당 옆에는 당산이 남아 있다.
군 관계자는 "이곳 성황당은 지금은 퇴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전 팔조령을 넘는 길손들에게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길손들은 길이 험난하고, 산적들이 득실거릴지도 모르는 팔조령을 무사히 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성황당 옆 수백 년 수령의 당산나무도 길손들에게 넓디넓은 나무그늘로 휴식처를 제공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이다.
하지만 팔조리 윗마을을 지난 옛길은 지난 1998년 팔조령 터널공사로 길이 끊겼다. 저수지 왼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의 경사를 줄이기 위해 갈지자형이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북행하는 길손들은 경남 물금의 벼랑길처럼 위험하지는 않지만 팔조령 길이 옛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벅찬 길이었다. 영남대로 정상부 옛길은 팔조령 구길에서 표지판을 따라 길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청도지역에는 팔조리~양원리 약 1.5㎞, 양원리~유등리 약 1.5㎞, 합천리~군청 약 3㎞, 군청~청도역 약 1.5㎞, 원동고개 약 0.4㎞ 등 잔존구간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원골, 영남물고개, 납닥바우 등 사연 가득
영남대로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다. 팔조령 동쪽 산 8부 능선에 술이 나는 샘인 주천당(酒泉堂)이 있는데 누구든 단 한 잔의 물만 마셔야 물이 안 마르고 고개를 넘는데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샘이다. 이러한 전설이 잘 지켜지고 있는데 어느 해 한 군수가 고개를 넘다 이 말을 듣고 한 잔을 마시고는 두 잔을 마시려고 했다. 여러 사람이 만류했지만 '상놈은 한 잔만 마셔야 하고 나는 양반이기 때문에 무방하다'면서 두 잔을 들이켰다. 이후 술샘이 금방 말라버리고 군수도 고개를 내려가다 급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군수가 화를 당한 골을 지금까지 원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서면 양원리와 화양읍 유등리의 경계에 있던 영남 물고개는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 물고개는 조그만 보로, 물이 하류가 아닌 상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보가 도로변에 있어 행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납닥바위와 찬물샘도 영남대로 상에서 빠질 수 없다. 납닥바위는 지금의 청도역 동편인데 경부선철도 부설로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다. 이 바위는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에다 부근에 찬물샘이 있고, 거기에 고목이 그림자를 이루었다. 괴나리 봇짐에다 짚신 감발로 지나는 나그네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서로 수인사를 나누면서 행선지와 용무 등을 이야기하고 다시 만날 장소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행 또는 북행 시에 이 바위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경상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청도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일제시대 중엽까지 청도의 납닥바위로 유명했다고 한다.
◆옛 큰길 찾기 운동 시작해야
청도군은 영남대로 옛길을 찾기 위한 기초작업을 벌이고 있다. 팔조령 일대와 청도 지역에 남아있는 옛길의 보존상태와 훼손유무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군 관계자는 "영남대로 청도구간 팔조령과 청도천 삽다리, 유천 징검다리 등을 복원해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군은 팔조령 주막과 팔조리 성황당, 샛별장터, 영남물고개, 납닥바위 등 지역에 옛길과 관련된 19곳을 정비하고 문화재 지정신청 등을 앞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전 공무원 박상훈(59) 씨는 "둘레길 등 지자체마다 길 새로 만들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영남대로 상의 옛 큰길 찾기 운동도 바람직한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옛 정취를 살리고 더 늦으면 살아있는 길을 아무도 모르게 된다며 우려하고 조속한 옛길 찾기 작업을 강조했다.
영남대로 복원 기초작업을 벌였던 이서면 임형수(52) 씨는 "팔조령 구길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 옛길은 3~4m 넓이로 당시에는 대로에 속했다"며 "팔조령 구간 경우 중간부분이 잘려나갔고, 6·25 당시 통신케이블 묶음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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