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 주석의 충견이었다. 그래서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을 뿐이다."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묻는 중국 사법부에 강한 반기를 든 강청(江靑'1914~1991)의 항변이다. 아들을 바라던 아버지와 첩 사이에서 딸로 태어난 강청은 어려서부터 담이 크고 맹랑했다. 본명은 이운학(李雲鶴)이었으나 15세에 산동실험극원에 입학, 훗날 배우로 활동할 때는 남평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33년 19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청도대학 도서관 직원을 하며 문학적 교양을 쌓고 이후 연안에 도착해 이름을 '강청'으로 또 바꿨다.
마오쩌둥과의 운명적 만남은 1937년 연안에서 강청이 주연을 맡은 '타어살가'(打漁殺家)가 공연됐을 때. 이때 강청은 24세로 이미 4번의 결혼경험이 있었고 마오쩌둥은 45세로 두 번째 부인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본격적인 정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해 문화혁명 기간동안 극좌적 사상을 선동해 1969년 중앙정치국 위원이 됐다. 평소 측천무후나 여후(유방의 첫째 부인)에 비견될 정도로 권력에 집착했다. 1973년 주도권 장악을 위해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과 사인방을 구성했다가 화국봉 등에 의해 숙청, 재판에 회부돼 1981년 오늘 반혁명분자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됐으나 기사회생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1991년 감옥에서 자살했다.
우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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