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12)새마을 사업 우수 마을, 청도읍 신도1리

입력 2011-01-20 14:33:34

청도군 청도읍 신도마을을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 부른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 1969년 8월 초, 수해지역을 돌아보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도1리 주민들이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수해복구뿐 아니라 마을 안길을 넓혔고, 지붕개량이 되었으며, 담장도 말끔하게 손질해 놓아서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위를 물었다. 마을 대표는 "마을 사람들이 수해로 무너진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이 기회에 환경을 좀 더 잘 가꾸어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보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했다. 그에 따라 정부의 지원 이상으로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협동하여 이루어 졌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같은 마을 사람들의 자조정신과 협동심에 큰 감동을 받았다. 아울러 머릿속에는 농민들의 근면'자조'협동정신을 일깨워 농촌을 개발해 보려는 새로운 구상이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을 현황을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 담당 비서관이 마을의 이장이던 박종태(82) 씨의 집에서 사흘 동안 숙박하며 상세하게 조사 보고하였다. 또한 청도군에서도 청도읍 경부선 주변 단위지역 개발계획을 보고하였다. 그 같은 보고를 검토한 끝에, 신도마을 주변을 국토보존 사업의 시범지구로 조성함으로써 자조정신이 미약한 다른 지역의 자력 개발을 촉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와 함께 파급효과를 거두고자 지붕개량을 비롯한 마을 사업에 필요한 예산 1천320만원을 지원하였다.

청도군 신도마을에서는 이미 1957년부터 잘 살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마을의 이장이던 박종태 씨를 비롯하여 김봉영과 이인우 씨 등이 앞장을 섰다. 자력으로 부엌개량'부업 장려'집집마다 한 통장 갖기'부락 면모 가꾸기'농로 개설'소하천 정비 같은 사업을 단계별로 추진하였다.

1단계(1957~60년)로 환경개선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테면 부엌개량'담장 고치기'화장실 개량 같은 사업이었는데, 도시생활 수준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하였다. 2단계(1961~66년)로 잘 살기 운동을 추진하였다. 집집마다 감나무'복숭아나무 같은 유실수를 30그루 이상 심도록 권장하였다. 아울러 절미 저축과 공동구판장 운영, 그리고 마을금고 육성에 힘을 기울여 부자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이어서 3단계(1967~71년)로 담장 개보수와 전기 가설을 추진하였다.

새마을 지도자로 앞장섰던 김봉영(81) 씨의 체험담을 옮겨 적는다. "불과 3년여 만에 도내 최우수 부락으로 발전하였다. 남녀가 협동하는 마을, 단결이 잘 되는 마을, 씨족 차별이 없는 마을이 되었다. 또한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한다고 해서 '개미마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래서 비록 내게 손해가 있어도 신명이 났다. 그뿐인가, 소하천 양쪽 500m를 석축으로 마무리하고 나니 마을의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주위의 칭송과 감탄을 혼자 듣기가 민망스러웠다."

또한 주민들의 숙원이던 경부선 철도의 간이역 설치를 추진하였다. 김봉영 씨가 추진위원장을 맡아서 철도청을 비롯한 관계 기관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문하고 청원하였다. 그 같은 집념과 끈질긴 노력으로 67년 6월 11일, 마침내 '신거역'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농산물의 원활한 유통과 생활환경의 변화가 속도를 더했고, 이듬해에는 정부의 배려로 전기와 전화까지 개통되었다.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고, 남부럽지 않은 마을로 발전하였다.

김봉영 씨는 '신거역' 설치에 따른 감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1년여 기간 동안 철도청'지방청'보선소를 내 집 같이 드나들었다. 그동안의 고생과 시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만, 1966년 12월 28일 철도청장으로부터 마침내 허락을 받아 내었다. 그로부터 플랫폼의 성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두 달 동안 다들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지게로 흙을 져 날랐다. 그리하여 1967년 6월 11일 개통하게 되었는데,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위한 전국 지방장관 회의가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서 청도읍 신도1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새마을 운동의 구상을 피력하였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가 회고록에서 밝힌 말이다. 그리하여 신도마을의 사례는 전국으로 파급되었고, 한 해 동안 전국 25개 기관 단체에서 1천473명이 신도마을을 견학하고 돌아갔다. 그 가운데는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 새마을 지도자 이석걸 씨를 비롯한 지도자 150명도 다녀갔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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