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겨울 고래불

입력 2011-01-19 07:29:12

결코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걷는 걸 참 싫어한다.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곤해지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연초엔 내 고향 영덕의 고래불해수욕장 모래사장은 잠시라도 걷는다. 겨울 고래불은 한산하지만 그 바다엔 위대한 선인의 꼿꼿한 정신이 넘실거리고, 내 젊은 한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독 고래불을 좋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호올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라는 시조를 남기신 선생이다.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 삼은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특히 고래불은 이색 선생이 어렸을 때 고래불 맞은편의 상대산에 올라가서 고래가 물을 뿜는 것을 보고 '고래뿔'이라고 하여, 이곳의 지명이 고래불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 오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내가 글을 쓰면서부터 '목은문고' 권12의 '답문' 편에 어떤 사람이 글을 쓰려면 무엇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느냐고 묻자 선생은 "스승은 사람에게 있지도 않고, 서책 속에 있지도 않으니, 혼자서 터득할 수밖에 없다. 혼자서 터득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야말로 요순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한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내 개인적인 체험으로, 젊은 한때 이곳에서 지금은 훌륭한 기업인이 된 친구와 장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회를 팔기도 하고 파라솔을 빌려주기도 하던 이른바 여름 한철 장사였다. 무엇인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했고, 언제까지나 이 장사만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 고래불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몸은 고달팠지만 해수욕장에서 인명을 구하기도 했고 젊음을 불태웠던 곳이다.

그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걷는다. 그때보다는 나아진 지금 그때만큼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반성도 하면서, 겁없이 일에 매달렸던 시간을 그리워한다. 겨울 고래불, 추운 날에도 얼지 않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그 변함없음과 힘참에 경의를 표하며 나태해지는 나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겨울 고래불을 걸으며 나는 내 삶의 열정 찾기와 혼자 터득하기를 다짐한다. 열정을 갖는 일, 혼자서 터득하기, 그 모두 쉬운 일은 아니다. 워낙 둔재라 언제나 남을 뒤따라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바닷물이 얼지 않는 것은 맹물이 아니기 때문인데, 맹물이 되어서 하찮은 추위에도 얼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손경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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