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축구팀 '오투 루벤스'
"메시! 이쪽으로!" "긱스! 패스, 패스!"
세계 축구를 호령하는 선수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컴퓨터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월드 스타 축구팀이다. 메시, 호날두, 카투소, 긱스, 파브레가스 등 전·현역 세계 축구 스타들이 모두 한 팀에 있다.
몸값이 어마어마한 선수들의 이름을 유니폼에 새긴 이 팀을 최근 대구 수성구 동도중 운동장에서 만났다.
축구 스타들을 '사칭(?)'한 이유를 물으니 축구장에서 난데없는 '평등' 타령이다. 이름을 부를 수도, 그렇다고 변호사님, 교수님, 작가님, 사장님 등 직업명을 부를 수도 없는 팀의 특수성 때문이란다. 3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어른들과 10대 청소년들이 '계급장 떼고' 한데 엉켜 축구를 하기 때문에 자칫 '건방질 수도', 반대로 '경직될 수도' 있어 학생들이 막 부를 수 있는 애칭을 선택했다는 것. 그래서 각자 좋아하는 유명 축구 선수 이름을 자신의 '애칭'으로 삼아 이름 대신 부르게 됐다. 일종의 '야자(반말 게임)' 축구다.
팀의 이름도 도깨비 같은 팀을 연상케 한다. '오투 루벤스'라고 하는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O₂(산소)'와 '루벤스(호모)'의 합성어란다. '산소 희롱 모임', '유산소 놀이하는 인간', '창단 주축인 50대가 축구를 하기 때문에 산소가 많이 필요해서' 등 해설도 가지가지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축구를 하면서 한바탕 신나게 노는 팀'이다. '놀 줄 모르는 인간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축구를 하면서 산소를 맘껏 마시자'고 붙인 이름이다.
이 팀엔 없는 것도 많다. 정해진 포지션도, 전술도, 시간도 없다. 포지션은 경기 때마다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서 실력만큼 뛰면 된다. 결과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 하나 얘기하지 않는다. 경기 후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이 팀의 금기사항 중 하나다. 기량을 떠나 모두가 즐거운 축구를 하기 위해서다. 전략·전술도 따로 없다. 그런데도 축구 실력은 웬만한 아마추어 팀 '저리 가라'다. 정식 경기를 한 적이 없어 공식적인 '성적표'는 없지만 대구직장인축구대회 우승팀과의 친선경기에서도 지지 않는 경기를 했을 정도다.
오투 루벤스 서태영 총무는 "비록 '동네스리가(동네축구)'지만 실력은 웬만한 축구클럽 못지않다"며 "자율적으로 축구를 하지만 클럽을 만들고 2년 정도 지나니 오히려 자율의 힘이 발휘돼 결과는 더 좋다. 전략, 전술, 포지션이 정해진 강팀과 경기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팀으로 성장했다"고 자랑했다.
'몇 시까지 한다'는 시간도 정해 놓지 않았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공만 찰 수 있는 상황이면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 '해질 때까지' 한다. 해가 짧은 겨울철엔 보통 오후 5, 6시, 여름철엔 오후 8시를 넘기기 일쑤다. 해가 질 때까지 공을 차는 것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란다. 그런데 매주 이렇게 축구를 하다 보니 실력이 쑥쑥 느는 것은 물론 체력도 크게 증대돼 해질 때까지 해도 웬만해선 지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 팀 최고의 특징은 '탈 세대'다. 세대 간 단절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함께하기 힘든 어른과 학생이 축구를 통해 화합하고 격의 없이 친해진다는 것. 팀 모토도 '청소년들에게 고향을 만들어 주는 축구단'이라고 정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축구팀을 계속 양성해 이곳을 학생들의 '축구 고향'으로 만들겠다는 것. 서태영 총무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 팀 창단 등 청소년 동네 축구 후원을 통해 청소년 지킴이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이곳 회원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라며 "생활축구팀도 이런 활동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는 '노소동락(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김)'이란 한마디에 다 녹아 있다.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이름을 부르면서 즐겁게 축구를 하다 보니 항상 웃음꽃이 핀다.
'노소동락'의 힘은 인성, 성장 등 청소년들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공부하다 마음껏, 그리고 안전하게 공을 찰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물론 언어 순화와 어른을 대하는 예의도 해가 거듭될수록 좋아진다는 것. 황태형(18·영남공고 2년) 군은 "잔디 구장으로 되기 전 동도중 맨땅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했는데 2년 전쯤 오투 루벤스가 이곳을 대여해 축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리게 됐다"며 "어른들과 함께 축구를 하다 보니 친구들과 할 때의 가벼운 느낌보다 '정'을 느끼게 되고 여러 가지 도움도 많이 받는다.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장래 상담과 조언도 해주신다. 친구들 간의 거친 표현도 사라지고 어른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는 등 육체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청소년들은 회비도 없다. 운동장 대여비와 음료수 비용 등은 몽땅 어른들의 몫이다. 그래서 더 부담 없이 함께 축구를 즐길 수 있다.
이 팀은 시작부터 독특했다. 정한영 변호사 등 2명이 어려움에 처한 친구가 운동할 수 있도록 돕다가 지금의 축구팀으로 발전했다. 친구의 '기분 전환'과 '건강', '체력' 등을 걱정해 토요일마다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야구공 등을 차에 싣고 다니며 '철인 5종 구기'라는 이름을 붙여 놀다가 알음알음 지인들이 더 합세하면서 급기야 2007년 8월 팀을 만들어 풋살을 하게 된 것. 이후 동도중 운동장이 잔디구장으로 조성되면서 2008년 '오투 루벤스'라는 축구팀을 만들게 됐다.
지금은 나이 구분 없이 섞어 축구를 하거나 '성인-청소년'으로 나누거나 외부 팀 초청 등의 방법으로 축구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소셜 사커 클럽을 만들어 NGO, 사회단체 활동가 등 친선축구대회를 여는 것도 계획하고 있다. 또 팀 정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축구클럽에 걸맞은 회칙과 운영 규칙을 만들고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입단 절차도 밟는 등 체계적으로 축구단을 꾸려나갈 생각이다. 그렇다고 '축구 잘하는 팀'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다. 회원이 많아진 만큼 A, B조나 1, 2부로 나눠 더 재밌고 즐겁게 축구하고, 신구 조화가 어우러지는 팀을 만들겠다는 것.
오투 루벤스 김도식 회장은 "이곳은 신구 세대, 선후배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곳으로, 실제 선배들이 후배들을 굉장히 챙겨주기 때문에 정이 넘친다"며 "지금도 축구만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가정사, 개인사까지 다 알 정도로 서로 친하지만 인간미가 더 물씬 풍기는 팀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민주, '尹 40%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에 "고발 추진"
尹 탄핵 집회 참석한 이원종 "그만 내려와라, 징그럽다"
"尹 영장재집행 막자" 與 의원들 새벽부터 관저 앞 집결
尹 탄핵 정국 속 여야 정당 지지율 '접전'…민주 37% vs 국힘 36.3%
공수처장 "尹 체포영장 집행 무산, 국민들께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