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오지 설산에 들어선다
철학자나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존재에 대한 회의는 온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내 뒤에 남겨진 발자국에 떳떳한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물음. 이럴 땐 조용히 배낭을 꾸린다. 행선지는 겨울 산. 한적한 설산으로 접어든다. 투명한 결정에 체중이 얹어진다. 하얀 공명을 타고 플레이 버튼 작동 음이 들린다. 이제 시작이다. '나'와의 데이트.
◆우리나라 9번째 높은 산, 태백산맥의 중심
바야흐로 눈꽃산행의 절정이다. 21일 개막되는 태백산 눈꽃축제를 신호로 전국 산은 원색의 등산복 물결로 북적이게 된다. 상고대의 투명한 반사처럼 축제장마다 화려한 이벤트들이 펼쳐진다. 이런 소란을 피해 혼자만의 고독에 빠지고 싶다면, 설산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싶다면 정선의 가리왕산이 최적의 대안이다. 강원도 오지에서 상처 받은 영혼들을 말없이 보듬어 주는 가리왕산 넓은 품속으로 들어가 보자.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에 걸쳐있는 가리왕산은 높이만 1,561m. 우리나라에서 '톱 10' 안에 드는 산이다. 동해안 북단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의 중심축을 이루며 상봉, 중봉, 하봉을 거느리고 있다. 어은골, 청량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은 오대천과 조양강으로 흘러들어 남대천까지 수계를 펼친다.
너른 품안엔 다양한 침엽수, 활엽수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취나물, 두릅, 산작약, 당귀 같은 산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삼봉표석'(山蔘封標石)을 세워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했을 정도로 왕실의 든든한 산삼 공급처였다.
강원도에는 모두 가리(加里)자 돌림의 산이 세 개(가리산, 가리봉, 가리왕산)있다. 이 중 산세와 지명도에서 우세한 가리왕산이 맏형구실을 하고 있다. 흔치 않은 지명임에도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역 학계에서는 옛날 '맥국(貊國)의 갈왕(또는 가리왕)이 이곳에 피난해 궁궐을 짓고 머물렀다'는 자료에서 산 이름의 유래를 추측하고 있다. 이 전설을 입증하듯 장전리에는 대궐 터가 남아 있다.
이곳 등산로는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산림휴양관이나 세곡 쪽이 발달해있다. 취재팀은 대구에서 접근이 쉬운 장구목이-정상-중봉-숙암리 코스를 선택했다. 장구목이골 앞 도로는 정선과 진부를 잇는 59번 지방도. 이곳은 이끼계곡으로 유명하다. 여름철엔 바위를 감싼 연초록의 융단을 감상하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7, 8월 이끼에 덮였던 계곡이 지금은 눈과 얼음에 묻혀 황량한 바람소리마저 삼켜버렸다.
◆길이 100km 임도에선 매년 MTB, 마라톤축제
연일 눈 세례에 빙판이 진 농로를 따라 일행은 계곡으로 들어선다. 한적한 오지산 사위는 침묵에 잠겼다. 소리가 잦아든 곳, 계곡엔 물소리만 정적을 깨운다.
30분쯤 올랐을 때 동서로 길게 뻗은 임도가 나타났다. 가리왕산 특징 중 하나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임도. 총 연장 길이만 100㎞에 이른다. 단일 산에 건설된 임도 중 최장거리가 아닐까 싶다. 이 길을 따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약초꾼들, 산악자전거 마니아, 마라토너들이 계절을 바꿔 바삐 드나든다. 정선군에서도 매년 5월에 약초산행, 8월에 MTB대회, 산악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다.
임도에서 차 한잔으로 추위를 녹이고 급경사를 올려친다. 가리왕산 장구목이골은 전국에서 '빡센 산'으로 악명이 높다. 화방재(태백산), 만항재(함백산), 운두령(계방산) 등 눈 산행 코스의 상당수가 800~1,000m 중턱에서 시작하는데 비해 장구목이골 고도는 400m를 조금 넘기는 정도. 내로라하는 건각들도 여기서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밭 탓에 마땅히 쉴 곳도 없다. 종아리를 압박해오는 피로는 주목군락지에서 푼다. 살짝 흩뿌리는 하얀 결정들이 푸른 침엽 위에 내려앉는다. 천년 세월 위에 또 한 겹의 시간이 얹히는 순간이다.
두 시간여 고독한 레이스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 망운대는 '정선8경'중에 하나. 강원도 지붕답게 사방으로 명산들이 실루엣을 이루었다. 동쪽엔 청옥'두타산이 서쪽으로 치악산, 북쪽으로 오대산'계방산이 둘러서 있다.
정상 평원에 우뚝 서니 옛날 갈왕이 왜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는지 한눈에 이해된다. 맥국은 부족국가 시대 동예계의 한 소국으로 추측된다. 사학자들이 지금 춘천을 맥국으로 비정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전설이 사실과 전혀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강원도 용화산, 삼악산 등엔 모두 맥국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어 가리왕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키우고 있다.
칼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다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일행은 중봉으로 향한다. 중봉은 세곡과 숙암리를 잇는 교통로.
◆맥국 가리왕의 전설 따라 숙암리 하산길로
숙암리 하산길은 북사면이 이어진다. 정강이를 덮던 눈은 이젠 무릎까지 빠트린다. 눈 더미를 헤치느라 숨이 가빠 오지만 그래도 다들 이 눈 세례를 만끽하기 위해 새벽부터 강원도까지 달려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오장동임도와 만나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마을로 들어서는 오솔길이 나온다.
임도 주변엔 철책이 둘러쳐 있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총 연장 37㎞에 이르는 거대한 철의 장막이다. 1990년대 중반에 수렵장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흉물이다. 시민단체들의 거듭된 철거 주장에 군은 '야생조수 보호증식장'으로 이름만 바꾸어 버티고 있다. 울타리를 쳐서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2시간 이상 이어지는 하산 길은 따분하다. 이럴 땐 숲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낙엽송, 허물을 벗듯 껍질을 밀어 올리는 자작나무숲이 이방인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옛날 외국동화에서 읽었던 자작나무를 이제야 또렷한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총 13.5㎞. 5시간여 산행 끝에 드디어 오늘 종착지 숙암분교에 도착했다. 학생수가 줄어든 분교는 이제 학교 문을 닫고 '별천지박물관'으로 거듭났다.
강원도 산골의 석양은 도회지보다 빨리 왔다. 어둠이 깃든 산들도 이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휴식에 든다. 산골 피난처에서 밤을 맞았을 가리왕도 이곳 어디쯤에서 바위틈에 고된 몸을 누였을까. 이름도 '숙암'(宿岩)처럼.
◆교통=중앙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 바꿔 탄 후 진부IC에서 내린다. 정선 쪽으로 59번 지방도를 타고 오대천을 따라 20km쯤 가면 오른쪽에 장구목이골에 도착한다. 진부IC에서 30분 소요.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민주, '尹 40%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에 "고발 추진"
尹 탄핵 집회 참석한 이원종 "그만 내려와라, 징그럽다"
"尹 영장재집행 막자" 與 의원들 새벽부터 관저 앞 집결
尹 탄핵 정국 속 여야 정당 지지율 '접전'…민주 37% vs 국힘 36.3%
공수처장 "尹 체포영장 집행 무산, 국민들께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