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남편' 손에 있는 딸 데려오고 싶은데…
"소윤아, 소윤아."
김미정(가명·32) 씨는 휴대전화에 있는 딸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정 씨는 딸 소윤이(가명·4)와 자신의 어머니, 두 여동생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음의 빚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주먹질하는 남편에게서 딸을 데려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자궁 경부암을 앓고 있는 병든 몸을 친정 식구들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 "엄마가 미안해"
담배 연기가 자욱한 PC방, 그곳은 한 때 미정 씨의 일터였다.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PC방에서 손님들이 피운 재떨이를 비우고, 바닥을 청소하고, 요금을 계산했다. 소윤이가 태어난 지 9개월이 되던 달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어린이집이 쉬는 주말에는 어린 딸도 PC방에서 함께 지냈다. 월급 65만원을 벌기 위해서였다. 금연석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PC방은 육아에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래도 미정 씨는 소윤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딸을 맡기기 싫었다.
그는 남편(30)이 두려웠다. 소윤이가 세상 빛을 본 지 20일째 되던 날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온 남편이 대뜸 "가게를 차리자"고 말을 내뱉었다. 남편이 폐비닐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둔 뒤 월세 30만원과 분유값을 대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럴 돈이 없다"고 설득했지만 갑자기 남편은 부엌에서 식칼을 빼들었다. 새근새근 잠자는 딸의 목을 두 손으로 비틀고 미정 씨를 칼로 위협하며 "함께 죽자"고 했다. 어린 딸을 부둥켜 안고 미정 씨는 울부짖었다. 딸의 기억 속에 채색될 아버지의 모습이 평생 이런 것이라면 미정 씨는 남편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 맞는 아내…병든 엄마
남편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다. 미정 씨는 남편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 갔다가 친척에게 5만원을 빌렸다. 소윤이 분유값이 없어서였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남에게 손 벌리고 다닌다'며 소윤이를 등에 업은 미정 씨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남편의 폭력이 계속 이어지면서 미정 씨는 "이 남자를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친정 식구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지 못했다. "시집 가서 잘 살 줄 알았던 큰 딸이 매 맞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친정 엄마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참아보려고 했어요."
참다 못한 미정 씨는 결국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헤어지자, 더 이상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이혼을 거부했다. 폭력의 증거를 남기지 못했던 미정 씨는 이혼 서류에 도장도 못 찍고 소윤이와 함께 남편 곁을 도망쳤다. 그는 경북 경산에 새 둥지를 틀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칼국수 집에서, 야간에는 동네 국밥집에서 일했다. 소윤이는 둘째 동생 미연 (27·여) 씨에게 맡겼다. 미정 씨는 '엄마 노릇'이 하고 싶었다. "내가 부지런히 일하면 우리 두 식구는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하늘은 무심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자궁 경부암 2기 진단을 받았다. 암 선고를 받던 그 순간, 소윤이 얼굴이 떠올랐다. 미정 씨가 죽은 뒤 남편 손에 맡겨질 딸을 생각하니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미정 씨 소식을 들은 남편이 "애는 내가 키우겠다"며 경산에 찾아왔다. 딸은 "아빠한테 가기 싫다"며 엄마를 부르짖었다. 미정 씨는 딸을 붙잡지 못했다. 남편의 폭력이 무서웠고 병든 몸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두려웠다. 얼마 전 남편이 아이를 차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가슴을 쳤다. 미정 씨는 그날 딸을 붙잡았어야 했다.
◆딸과 친정엔 마음의 빚
딸을 잃고 병을 얻은 미정 씨는 친정이 있는 대구 달성군으로 옮겨왔다.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세 딸을 키우고, 백내장과 관절염으로 힘들어하는 어머니에게 큰 딸은 병든 몸을 의지해야 했다. 병원비는 첫째 동생 미수(가명·31·여) 씨가 댔다. 미수 씨는 언니를 위해서 적금을 깼다. 결혼을 위해 한 푼 두 푼 모아온 돈이었다. "언니가 먼저야. 결혼은 천천히 해도 되잖아."
미수 씨는 SK 텔레콤 전화 교환원이다. 월급 130만원으로 언니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할 여유는 없다.
항암치료와 입원비 등 500만원이 넘는 병원비는 첫째 동생에게 짐이 됐고,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으로 상처 입은 큰 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다. "첫째한테 제일 미안해요. 좋은 남자를 만나도 돈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는데. 못난 언니 때문에…."
그래서 미정 씨는 "나만 죽으면 모든 문제가 끝날 것"이라며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가족의 짐이 되기 싫었다. 하지만 소윤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미정 씨는 전화 통화로 매일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윤이의 질문은 언제나 같다. "엄마, 언제 와?"
미정 씨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데리러 오리라 생각하는 딸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소윤이는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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