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눈빛·확고한 펜 선…지사의 풍모
정확한 데생력을 가지는 것이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기준이거나 조건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기질적 성향과 작품의 개성을 형성하는 데는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예술적 우수성과는 무관하게 작품의 성격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쾌대의 경우 우리 근대 미술가 중 보기 드물게 뛰어난 소묘의 능력을 갖춘 화가이고 정교한 선묘로 이루어진 재현적인 형태가 그의 작품에서 큰 특징인 화가다.
골기 있고 단단해 보이는 이 스케치의 필선은 부드럽고 섬세한 연필 선보다 거칠 듯 간결하다. 힘 있게 잡은 펜으로 단호하고 명확하게 빠르게 그은 선들은 이 인물 묘사가 얼마나 확신에 찬 데생인지 금방 알아차리게 한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의지와 단호한 눈빛은 깊고 예리해서 어떤 결연한 뜻을 품은 지사의 풍모를 담고 있다. 그는 유화로 옮기기 전의 모티프를 사전에 소묘로 제작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드로잉은 특히 그의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의 밑그림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종이의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림 일부가 훼손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인상을 잃지 않아 그의 소묘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간혹 조각 같은 데서는 사지가 상실되거나 특히 두상에서 이목구비 같은 중요한 부분이 파손된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럴 때도 잘려나가 없는 부분은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채우도록 그냥 두게 된다. 작품의 통일성이나 일체성은 일부만으로도 나머지 전체를 충분히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쾌대는 그가 남긴 스케치들을 통해 짐작하건대 일찍부터 소묘에 두각을 드러냈던 듯하다. 특히 사실적인 사생력을 강조했던 그의 형 이여성의 말을 상기한다면 이 분야에 특히 주력했던 것이 분명하다. 경북 칠곡군 신동 출신인 이쾌대는 대구수창초교를 졸업했지만 대구에서 그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바대로 그의 형 이여성이 처음 대구서 양화를 제작하고 발표하던 1923년 즈음이 신동초교에 입학했던 그가 대구로 전학 올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인성이 동급생으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텐데 이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쾌대의 경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발견한 것은 상급학교에 진학한 이후의 일로 휘문고보에 재직했던 장발 선생에 의해서였다. 1932년 5학년 때 제11회 조선미전에 '정물'을 출품해 처음 입선하고 그해 9월 전조선학생미전에서 '자화상'이 중등회화 3등을 해 동아일보(9.29)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1933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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