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특별한 인연

입력 2011-01-10 08:08:46

교과서 중에 식물의 한살이를 살펴보는 단원이 있다. 아이는 화분에 씨앗을 심어 준비물로 가져가야 했다. 밥 위에 놓아먹던 검은 콩을 한 줌 불려서 남편에게 심어주게 했다. 늦어서 속을 태우기도 했지만 녀석의 화분에도 싹이 났다. 학기가 끝나는 날, 대부분 친구들이 빈 화분을 가져갈 때 아이는 두 촉 남겨 들고 왔다. 하나는 콩인데 하나는 정체불명이라고 의심쩍어했다. 나는 콩 심은 데 콩 나는 걸 모르냐며 종류가 다른 콩이리라고 일축했다.

여름 휴가를 지날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한 촉이 겨우 남아 꽃을 피웠다. 꽃이 피었다고 유난을 떨며 다만 콩 꽃이 이렇게 예쁜가 잠시 의아해했다. 그러나 기다려도 꼬투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하더니 어느 날 꽃 진 자리에 마른 콩알 같은 까만 씨앗이 겉으로 툭 불거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분꽃 씨앗이 아닌가? 그 속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고 화장품이 귀하던 시절 뽀얗게 얼굴에 바르던 분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꽃씨를 얼굴에 바름으로 해서 여인들이 꽃보다 더 예쁘게 진화해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콩 심은 데 웬 분꽃인가.

"당신은 콩 심으란 화분에 꽃은 왜 심었어요?" 남편은 준 대로 심었는데 그걸 왜 자기한테 묻느냐며 생뚱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내가 사온 콩 속에 꽃씨가 들었었나 잠시 생각하며 아이에게 아빠 흉을 보았다. 글쎄 꽃씨랑 콩도 구분 못하고 심었지 뭐냐고 말이다. "엄마, 그게 아니고 아빠가 밤중에 흙을 퍼 담을 때 꽃씨가 따라 들어간 거 아닐까?"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남의 자리에 들어와 꽃을 피운 분꽃은 어느새 씨앗 하나를 또 품었다. 여기까지 오도록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나의 우매함을 저 꽃들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연초록의 꿈과 분홍빛 향기를 단단하게 여민 작은 씨앗은 어느 곳에 심어질지 정처모를 심연을 혼자서 견디고 하늘을 열어, 제 할 일 묵묵히 다 해냈다. 초대도 하지 않은 자리에 불쑥 들어와서는 특별한 인연으로 당당히 내 집에서 일가를 내린 분꽃이다. 불편한 적응기간이 두려워 소중한 것을 놓치곤 하는 삶에서, 이제 나도 이런 인연으로 남고 싶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 수첩으로 옮겨지던 이름, 요즘은 꾹꾹 눌러서 새로 저장되는 이름으로 말이다.

윤 은 현 경일대 외래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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